청규(淸規)와 누규(陋規)
 
 [2005-04-28]

청규(淸規)와 누규(陋規)

 


누규(陋規)라는 말이 있다. ‘누’란 더러운 것 추한 것을 뜻하는 글자이다. 따라서 ‘누규’란 더러운 규범, 더러운 규칙을 포괄하는 것이다.

‘누규’에 대칭되는 낱말은 청규(淸規)이다. ‘청’은 더러운 것의 반대 개념인 ‘깨끗함’ ‘맑음’을 뜻하는 글자이다. ‘청규’란 글자 그대로 깨끗한 규범, 청렴한 규칙을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면 무엇을 ‘청규’라고 하고, 무엇을 ‘누규’라고 하는가. 옛글에 보면 ‘청규’란 사대부와 지식계층 또는 지배층이 지켜야 할 도덕률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규’란 뒷골목이나 도둑의 세계 또는 하층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용화된 규범이나 규칙을 말하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상부층에게는 맑고 깨끗한 도덕률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도덕률의 잣대에서 빗나가면 그것은 상부층의 존재 이유를 훼손시키는 요인이 된다. 이것은 하층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뒷골목이나 도둑의 세계에도 일정한 룰이 있어 왔고 그것이 지켜져야만 그 나름대로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역사를 보는 각도에 따라서는 한 사회의 건전성과 장래를 측정하는 바로미터로 ‘누규’에 큰 비중을 두는 수도 있다. ‘청규’보다 ‘누규’의 질서가 그 사회의 실상과 앞날을 예측하는 가늠자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의미에서 ‘청규’는 사회를 구성하는 규범 가운데 상부구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누규’는 두말 할 나위도 없이 하부구조이다.

 

한 나라와 사회를 건물에 비유한다면 그 상부를 이루고 있는 ‘청규’가 무너지면 물갈이로 개혁을 하거나 개축(改築)으로 대처할 수도 있다. 물론 상부의 물갈이는 법률의 잣대로 개혁할 수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청규’ 즉 도덕률의 잣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누규’이다. 건물의 하부구조 또는 기반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누규’가 무너지면 그 건물 자체의 붕괴가 임박했음을 말해 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누규’는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다. 법 없이도 사는 백성들의 도덕률은 그만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옛 선현들이 백성들의 생활률과 도둑세계의 불문율을 함께 묶어 ‘누규’라고 규정지은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사실 뒷골목의 생리와 의리라던가 도둑이나 소매치기 세계의 금기사항 그리고 뇌물을 주고받는 행태 등이 모두 ‘누규’에 속하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누규’는 바로 백성들의 정서와도 일치하는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아무리 도둑이 극성을 부려도 도둑질할 대상과 장소를 구분했던 것이 우리네 사회정서였다. 뿐만 아니라 뇌물을 받는 일이나 부를 축적하는데 있어서도 남의 눈을 두려워하고 몸을 도사리는 것이 일관된 생활패턴이었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정서와 생활패턴은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지 오래다.

바야흐로 ‘누규’가 총체적으로 파괴되고 있는 상황이라는 이야기다. 최소한으로라도 지켜야 할 하부구조의 도덕률이 붕괴되는 일처럼 심각하고 위험스런 일도 없다.

 

우리 사회는 ‘청규’와 ‘누규’가 동시에 무너지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청규’가 무너지는 상황은 과감한 인사개혁과 부정부패의 척결로 대처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 듯 싶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의 정립에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기득권을 누리려는 고루한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는 상황에선 모든 것이 구두선에 그칠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크게 두 가지로 손꼽을 수 있다. 첫째는 ‘청규’가 무너지면서 ‘누규’까지 무너뜨리는 행태가 급속하게 번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청규’와 ‘누규’가 뒤범벅이 되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상부층의 도덕률이 백성들의 그것보다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누규’마저 파괴시키는 작용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이런 사회적 양상을 역사가들은 천하대란의 시기 또는 역사적 대전환기라고 흔히 일컫는다.

 

 

이  규 행

언론인

사단법인 국학연구소 이사

더 데일리 포커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