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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위에 군림하는 사법부
조기숙의 재미있는 정치이야기
[2009-09-15 오전 10:18:00]
 
 

조기숙 교수
얼마 전 있었던 이혼소송에 대한 한 신문의 기사다. “대기업 임원 출신의 50대 가장이 결혼 생활 내내 돈을 많이 벌어오라고 강요하며 자신을 ‘무능력자’로 헐뜯고 다닌 아내를 상대로 제기한 이혼소송에서 승소, 20여년 간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마감하게 됐다.” 두 신문만이 남자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음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이것이 이혼과는 무관한 사안인 것처럼 슬쩍 비켜가고 다른 신문들은 아예 여자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남편에게 돈 많이 벌어오라고 바가지 긁은 여자는 이혼을 당해 마땅하다는 식이다.


물론 내가 법원이 이혼을 허가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이혼하기가 너무 어려운 나라다. 한쪽 배우자가 “이제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면 쉽게 이혼할 수 있는 서구의 경우와는 달리 배우자에게 치명적인 하자가 없는 한 우리 법원은 좀처럼 이혼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정작 결혼생활이 파탄이 났는데도 체면 때문에 혹은 ‘남 잘되는 꼴 못 본다’며 이혼을 안해줘 고통받는 남녀들이 내 주위에만 해도 수없이 많다. 나는 개인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는 이혼을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이지 개인의 불행을 담보로 한 ‘결혼제도’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법원이 이혼을 불허하면서 가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이 오히려 더 웃기는 일이다.


하지만 이 판결이 눈에 들어온 이유는 몇 해전 우리를 경악시켰던 황혼이혼 패소판결과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52년간의 혼인기간 내내 남편(84)의 폭언과 폭행 등을 견디다 못한 할머니(76)가 낸 이혼소송에 대해 대법원은 패소판결을 내렸다. “배우자의 부당한 대우는 인정되지만 부부가 고령이고 결혼 당시 가치기준을 종합할 때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렀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판결이유다. 결혼 당시 가치기준은 부인에게 폭행을 해도 된다는 말인가.


그리고 76세 된 부인이 못살겠다고 소송을 낸 판에 혼인관계가 파탄에 이르지 않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우리 법원은 왜 이렇게 상식적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을 많이 쏟아내는가. 물론 대법원에 가기 전에 언론에 공개되는 판결도 있고 하급법원에서야 판사마다 성향이 다르니 다양한 판결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최근 명예훼손과 관련된 판결에서 우리 법원의 편향성을 또 한 번 읽을 수 있다.


시민단체를 ‘홍위병’에 비유한 칼럼으로 시민단체로부터 명예훼손으로 피소 당한 소설가 이문열씨가 승소했다. “‘칼럼의 공공성’과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결이유다. 이문열씨가 “안티조선 단체를 친북세력이라고 표현한 것도 독서토론회 과정에서 나온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수사적 과장 표현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 판결을 보고 내가 내린 결론은 담당판사는 홍위병이 날뛰었던 문화혁명 10년 동안이 살상되거나 핍박받은 사람만 2천만명에 이르는 ‘세계사의 대재앙’(이는 문화혁명에 가담했던 장본인의 표현이다)이라는 사실을 모를 만큼 무식하거나 아니면 상식을 뛰어넘는 창의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판결은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로부터 피소 당한 강준만 교수의 패소판결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강 교수는 이 기자의 최장집 교수 사상검증 기사와 관련해 기자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우호적인 글을 썼다. 기자가 사주의 사병(私兵)이 되는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기자를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살인업자’가 되도록 만든 조선일보의 시스템을 비판했을 뿐이다. 그러나 강 교수는 고법에서 패소해 이 기자에게 7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독자들이 이 두 가지 대조적인 판례를 보면서 우리 법원은 참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왜냐하면 내 눈에는 이 네 가지 판례를 꿰뚫는 매우 일관된 성향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우리 법원은 기득권 세력에게 관대하다는 것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원칙 하에 이렇게 유사 판결들이 일관성을 잃고 있는 것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와도 사법부는 항변할 자격이 없어 보인다.


미국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힘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미국의 독립적인 사법제도를 꼽는다. 민주주의는 다수결 원리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다수결은 다수의 독재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다수결과 소수의 보호’라는 두 가지 원칙이 함께 결합돼야 그 힘을 발휘한다.


대통령과 의원은 다수의 표를 받는 사람이 선출된다는 점에서 다수결 원리를 살린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다수가 힘없는 소수를 억압할 것을 우려해 사법부가 소수의 이익을 옹호하도록 대법관 종신제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놓았다. 여론의 변화에 따라 대통령이나 의회의 다수당이 바뀌더라도 사법부가 영향을 받지 않고 소수의 이익을 보호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실제로 힘없는 여성이나 흑인, 시민단체 등이 운동에서 가장 손쉽게 써먹는 전술은 법원에 호소하는 것이다. 미국 역사의 굽이굽이마다 변화의 기폭제는 법원의 판결에서 비롯됐다. 나치의 행진, 흑백 통합학교, 여성의 낙태권 등을 보호한 미국의 사법부는 이념과 상관없이 소수자의 인권과 권리를 보호함으로써 미국 민주주의의 디딤돌이 됐다.


대한민국의 사법부는 입신양명을 꾀하는 사람들이 사법고시를 보기 때문인지 약자를 보호하는 최후의 보루가 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대학시절 법대생과는 미팅도 하지 않을 정도로 출세지향형을 싫어했는데 요즘 판결을 보면서 그것이 나의 편견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약자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지닌 상식적인 사람들이 더 많이 판사가 되는 세상을 기대해본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choks@ewha.ac.kr

여성신문(womenis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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