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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올 젊은이들을 위한 한 걸음
조기숙의 재미있는 정치이야기
[2009-09-15 오전 9:07:00]
 
 

조기숙 교수
몇 해전 나는 학생들과 함께 <세계를 움직인 12명의 여성>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몇 개월 후에 K라는 학생이 내 연구실을 찾아왔다. 그 학생은 한참 동안 울먹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K의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리다 답답한 나머지 스무고개를 시작했다.


“내가 수업시간에 말 실수했어요?”“나한테 야단 맞았어요?”“성적이 잘못 나왔어요?”K는 계속 고개를 가로 저었다.“너 내 책 읽고 감동 받아서 그러니?”나는 K를 어떻게든지 웃겨보려는 마음에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건넸다. 놀랍게도 K는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나는 정말이냐고 재차 물었고 K는 이제 소리까지 내면서 울었다.


한참 후에 울음을 멈춘 K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K는 여고시절부터 정치인이 되는 것이 꿈이라서 대학도 정치외교학과를 지망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아버지는 그 많은 직업 중에 하필이면 여자가 왜 정치를 하려고 하느냐며 K를 윽박질렀다. 결국 꿈을 포기하고 2학년이 되면 전공을 바꾸려고 했던 K는 그러나 내 수업을 들으면서 다시 용기를 갖게 되었다. 또 <세계를 움직인…>을 읽으면서 K는 정치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확고히 다졌다. K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자신의 후원자가 되겠다는 다짐을 받기 위해 나를 찾아 왔던 것이다. 자신의 꿈을 남과 나누는 것은 꿈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이는 자신에 대한 약속을 더 강하게 만드는 의미도 있지만 주위사람들의 격려와 감시를 받을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기도 하다.사실 내가 그 책을 쓰게 된 것은 인천대학교에 있을 때 ‘여성과 정치’라는 과목을 가르치면서 적당한 교재가 없어 답답한 나머지 학생들과 함께 교과서를 만들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던 중 신입생 면접을 치르다 광명에서 온 세 명의 여학생이 정외과를 지원한 이유가 전재희 광명시장 때문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여학생에게 롤모델이 이렇게까지 중요한지 그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것이다. 수업시간에 여성이 정치를 해야 하는 이유를 열 번 설명하는 것보다 한 명의 롤모델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역시 행동은 말보다 강했다.


그 책을 계기로 나는 여성의 리더십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미국의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여성이 성공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남성과는 다르다고 한다. 남성에게는 학벌, 재능 등 개인적 자질이 중요했지만, 여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멘토가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즉 여성을 이끌어 주고 롤모델이 되어 줄 수 있는 선배가 있느냐 하는 것이 여성의 성공에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여성 국무총리가 탄생한다. 여성총리는 차세대 여성에게 살아있는 롤모델이 될 것이며 더 많은 여성을 고위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할 것이다. 필리핀, 파키스탄, 노르웨이 등에서 여성 수상과 대통령이 탄생했을 때에도 고위직에 여성이 다수 등장했다. 여성의 총리직 임명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미국과 같이 여권의 성장이 자연스럽게 여성총리의 탄생에 기여하는 경우이다.


1996년 재선에 성공한 클린턴 대통령은 자신의 재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여성유권자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알브라이트 국무장관을 임명했다. 이 때문에 알브라이트는 힘있는 실세 국무장관이었으며 대통령과 임기를 같이 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과 같이 지지도가 떨어지는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한 충격요법으로 크레송 총리를 임명한 경우이다.


프랑스는 1944년에 가서야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었을 만큼 정치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나라였다. 결국 크레송 총리는 언론의 구설수에 휘말려 1년도 못돼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장상 총리의 탄생은 우리의 지방의회 여성의원이 2.2%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크레송의 경우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아들들의 부패연루로 민주당마저 탈당한 대통령이 민심수습용으로 깜짝 카드를 빼든 것이다. 장 총리서리가 임명된 직후부터 필요 이상으로 언론에 시달린 이유 중의 하나도 여권이 충분히 성숙되지 않은 가운데 임명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임명직이든 선출직이든 여성 최고지도자의 등장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정치가 부정부패나 스캔들 등으로 위기에 빠지거나 아니면 혼란기의 과도정부 등 극심한 변화의 시기에 여성 수반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기존 정치에 물들지 않은 참신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때문에 여성은 어려운 시기에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국민들에게 높은 기대를 받게 된다. 결국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여성 최고 지도자들은 대부분 실패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조기숙 choks@ewha.ac.kr

조기숙교수(womenis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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