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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콘돌리자 라이스 美 신임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아버지로 부터 강한 의지와 미식축구 취미를, 어머니로 부터는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다. 세계적 피아니스트를 꿈꾸던 그는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의 아버지인 코벨 교수를 만나면서 정치학으로 방향을 틀고 소련 전문가로 입지를 다졌다. 흑인여성으로는 최초로 국무장관 자리에 오른 라이스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부시의 비밀병기’, 콘돌리자 라이스(51) 미 국무장관은 지난 2000년 미국 정치판에 화려하게 복귀했을 때 미 언론이 붙여준 별명이다. ‘사상 최초의 흑인 여성 국무장관’ ‘최초의 흑인여성 안보보좌관’ ‘부시 대통령의 워크 와이프(Work Wife : 직장내 부인)’ …. 그에게는 다채롭고 화려한 수식어가 늘 따라다닌다. 9.11테러 이후 혼돈의 국제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슈퍼파워 미국’. 이 초강대국의 외교정책을 지휘할 그의 존재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부시 대통령은 2004년 11월 16일 백악관에서 새 국무장관 지명을 공식 발표하면서 ‘라이스 체제에서 세계는 미국의 힘과 품위, 당당함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라이스 취임 후 미 외교력이 한층 강력해지기를 바라는 기대를 담은 발언이었다. 미국 언론도 라이스가 파월 국무장관에 비해 부시 대통령의 훨씬 큰 신임을 바탕으로 한층 강력한 ‘힘의 외교’를 구사할 것으로 전망했다. 이는 라이스의 개인적 역량 때문이라는 게 미국 언론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무엇보다 라이스가 오래전부터 부시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온 인물이라는 점이 그 근거로 꼽힌다.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지는 ‘파월은 사전에 약속해야 부시 대통령을 만나지만, 라이스는 약속 없이 어느 때든 부시를 만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표현했다. 라이스와 부시의 특별한 신뢰 관계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라이스는 역대 국가안보보좌관 중 유일하게 대통령과 함께 예배를 봤다. 2004년 11월14일 주미 영국대사관에서 열린 라이스의 50세 생일 파티에는 부시 대통령 부부가 예고 없이 참석해 남다른 관계임을 과시했다. ‘콘디’라는 애칭도 부시 대통령이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통령과 각료의 관계를 넘어 인간적으로 절친한 사이인 것이다. 따라서 라이스를 ‘부시의 워크 와이프’라고 일컫는 것도 크게 과장된 것이 아니다. 라이스와 부시의 특별한 관계는 부시의 아버지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라이스는 35세 때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인 부시 전 대통령의 보좌관에 임명됐다. 라이스에 대한 아버지 부시의 각별한 신임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89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만난 자리에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했던 얘기다. 그는 고르바초프에게 라이스를 소개하면서 ‘소련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모두 이 사람이 얘기해 준 것’이라고 설명했던 것이다. 미국의 언론은 대부분 ‘라이스가 닉슨 대통령 시절 헨리 키신저 이래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 국무장관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라이스가 국무장관이 돼 백악관을 떠나더라도 백악관 내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장악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신임 국가안보보좌관에 기용된 스티븐 해들리가 라이스 밑에서 일하던 국가안보부보좌관 출신이어서 두 사람 간의 협조가 어느 때보다 원활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대외정책 결정의 핵심 축인 국무부와 NSC를 동시에 장악할 것으로 보임에 따라 미국의 외교정책은 라이스에 의해 좌우될 게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라이스의 철학과 신념은 어떤 것인가? 부모로부터 ‘흑인이라고 절대 기가 꺾이면 안 되니 남들보다 2배 더 노력하라’는 가르침을 받으면서 강하게 키워졌다. 라이스가 강한 성격과 불굴의 의지를 지닌 것도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 미국 언론의 평이다. 어린 시절 라이스의 생활은 ‘세계적 음악가’가 되기 위한 전형적인 삶이었다. 어머니는 딸의 음악적 천재성을 확인하기 위해 배턴루지의 서던대학으로 보냈다. 이곳에서 실시된 테스트에서도 라이스는 천부적 자질을 인정받았다. 이후 어머니가 딸의 음악적 재능을 살리기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이 무렵의 라이스는 여느 아이들처럼 뛰어놀기보다 부모와 함께 피아노를 치면서 놀던 아이로 기억되고 있다. 피아노에 몰두하면서 라이스는 독서에도 빠져 있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지독한 독서광이었으며 학교에서는 늘 모범생으로 통했다. 학업성적도 뛰어나 1학년과 7학년을 건너뛰기도 했다. 라이스는 열 살 때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으로 버밍햄의 음악학교에 들어간다. 흑백 통합교육이 실시된 후 이 학교에 입학한 첫 흑인학생이었다. 이곳에서 라이스는 피아노 외에도 플루트와 바이올린을 배웠다. 하지만 이 학교에서의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딸에게 더욱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게 낫겠다고 판단한 부모가 라이스를 공립학교로 전학시킨 것이다. 옮겨간 학교에서도 라이스는 ‘두 배로 열심히 하라’는 가훈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했다. 세월이 흘러 대학에 진학할 무렵 라이스와 어머니는 세계 최고의 음악학교인 줄리아드를 선택하려 했다. 그러나 아버지 존이 반대했다. 아버지는 딸을 ‘그처럼 보수적인 학교’에 보내기를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라이스는 줄리아드 대신 덴버대학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진학 후 라이스는 피아노 대신 ‘다른 학문’을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세계적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던 꿈이 완전히 바뀐 것은 대학 2학년 때였다. 그해 여름 어느 축제에서 열한 살짜리 천재 음악소녀를 만나고서는 자신이 피아니스트로 대성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안토니아 펠릭스가 쓴 라이스의 전기에는 ‘그 소녀는 라이스가 그때까지 배운 모든 곡을 완벽하게 연주함으로써 라이스를 자괴감에 빠뜨렸다’고 돼 있다. 결국 라이스는 ‘피아노 외에도 많은 길이 있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전공을 모색했다. 여기서 나온 결론이 바로 정치학이었다. 그의 인생 항로가 결정적으로 바뀐 계기는 덴버대학에서 동유럽 정치를 가르치던 조지프 코벨 교수와의 만남이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의 아버지인 코벨 교수는 조국 체코슬로바키아의 외교관으로 있다. 조국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자 미국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유대인인 코벨 교수는 라이스에게 정치학, 그 가운데서도 특히 소련과 동유럽 정치에 대한 관심과 식견을 불어넣어 준다. 이에 보답하듯 라이스도 소련학 공부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특히 러시아어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코벨 교수를 기쁘게 했다. 지역 연구에서는 해당 지역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러시아어는 문법적으로 워낙 어려워 이를 제대로 익힌 뒤 소련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무척 드물던 시절이었다. 라이스는 결국 학부 전공으로 정치학을 선택하고 1974년 불과 열아홉 살의 나이에 학사 학위를 받는다. 전 과목에서 탁월한 성적을 얻어 최우수 졸업생의 영광도 안았다. 덴버대를 졸업한 라이스는 대학원 진학을 결심한다. 이때 그가 선택한 곳은 인디애나주 노틀담대학이었다. 1842년 로마신부회가 설립한 이 학교는 보수적 학풍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학교가 작은 덕분에 밀도 있는 교육으로 유명했는데, 특히 최고의 소련연구소를 보유한 것으로 정평나 있었다. 라이스는 이곳에서 본격적인 ‘학자의 자질’을 연마하게 된다. 노틀담대학으로 옮긴 라이스는 그 무렵 국제정치학계를 풍미하던 ‘힘의 균형’ 이론에 깊이 심취한다. 특히 한스 모겐소의 ‘파워 폴리틱스 (Power Politics)’ 이론을 접하면서 정치역학에 상당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운 힘의 외교를 중시하는 그의 자세는 이때 접한 정치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이스는 노틀담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끝내고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1975년 덴버대학으로 돌아간다. 돌아온 덴버대학에서 그는 1981년 박사 학위를 따는 데 성공한다. 논문 제목은 ‘체코의 군사제도가 자국의 정치 사회에 미친 영향 분석’이었다. 과거의 연구 축적이 부족한 주제여서 논문 준비에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라이스는 기존 연구에 의지하기보다 특유의 융통성 있고 파격적인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논문 작성을 위해 7주간 모스크바에 머무르면서 동원했던 ‘기발한 방법’은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그는 소련 전략방어사령부에 근무하는 인원수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군사기밀이어서 쉽게 알아낼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라이스는 사령부 청사의 창문 수를 헤아려 그것을 바탕으로 요원들의 수를 파악하는 방법을 썼다. 그는 사령부 창문 수를 일일이 계산한 끝에 전체 근무 인원이 5,000명쯤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훗날 전략방어사령부 사령관을 지낸 세르게이 아크로모프가 부시 행정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는 사령부에 근무하는 인원을 묻는 질문에 ‘5,000명쯤 될 것’이라고 대답했다. 라이스의 추정이 냉철한 관찰에서 나온 것임을 확인해준 셈이었다. 라이스는 1976년 민주당에 입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선 지미 카터를 지지했다. 그러나 1979년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카터의 대응을 지켜보고는 주저없이 민주당을 탈당했다. 당시 카터는 소련의 침공을 ‘야만적 행위’로 규탄하면서 소련에 대한 곡물 및 기술 이전 제한, 미국 연안에서 소련 어선들의 조업 금지 등 조치를 내렸다. 1980년 모스크바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는 한편 다른 우방들에도 불참을 촉구했다. 나름대로는 응징 조치를 취한 셈이었다. 그러나 라이스는 이러한 카터의 대응이 너무 순진하고 미숙하다고 결론 내리고 바로 민주당을 탈당해 공화당에 들어간다. 처음 그가 민주당에 들어간 것은, 그 역시 사회정책에서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외교만큼은 공화당과 같은 강경한 태도를 선호한다. 이와 관련해 라이스 자서전의 저자 펠릭스는 ‘라이스는 외교에서는 초강경책을, 그 외 분야에서는 강경책을, 그리고 사소한 일반문제에 대해서는 극히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라이스가 1981년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처음으로 발을 디딘 곳은 스탠퍼드대학 ‘국가안보 및 군비감축연구소’였다. 이곳에서 소련 및 동유럽 국가 연구에 몰두하면서 정열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수업 방식은 기존의 것과는 크게 달랐다. 학생들에게 정책 입안자 역할을 맡기고 그에 맞는 의견을 발표하도록 하는 ‘롤 플레이(Role play)’ 방식을 채택한 것이었다.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생생한 지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라이스는 전쟁을 미식축구에 비유하며 재미있고 알기 쉽게 수업을 진행한 것으로 유명했다. 라이스는 학자로서의 자질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1984년에는 두 권의 역저 <불확실한 동맹: 1948~1963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의 군대>와 <고르바초프의 영역>을 잇따라 출간했다. 촉망받는 학자로서 명성을 쌓아가면서 국방부 자문위원으로도 일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이런 가운데 1987년 그의 삶을 바꾼 운명적 만남이 또 있었다. 포드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인 브렌트 스카우크로포트의 스탠퍼드대학 연설회에 참석해 연설한 것이었다. 이날 스카우크로포트는 라이스의 식견에 매료돼 깊은 인상을 받았다. 훗날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으로 백악관에 입성한 스카우크로포트는 라이스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라이스는 1989년 아버지 부시의 국가안보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된다. 나중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고문으로도 일했다. 이 무렵 라이스는 무척 정열적으로 일했다. 특히 이 기간 동서독 통일을 기폭제로 동유럽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소련 및 동유럽 전문가인 그가 얼마나 바빴을지는 쉽게 짐작된다. 그는 1991년 3월까지 미 행정부의 최고 정점에 머무르면서 공산 체제 붕괴에 대한 미국의 외교정책을 입안하고 분석하며 다른 어느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생생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91년 봄 통일독일이 탄생하고 걸프전이 끝나자 라이스는 학교로 복귀하기로 결심했다. ‘일에 모든 것을 소진해 버렸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스탠퍼드대학으로 돌아가 현장에서 봤던 소련과 동구에 대해 강의했다. 저술활동에도 온 힘을 쏟았다. 대학 복귀 후 모두 5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세번째 저서 <독일 통일과 유럽의 변화-정책 수립에 대한 연구>도 발간했다. 스탠퍼드 복귀 후에는 라이스가 기대하지 않았던 특별한 일도 일어났다. 1993년 39세의 나이로 교무처장에 임명됨으로써 미국 서부의 최고 명문인 스탠퍼드대의 2인자가 된 것이다. 1999년 조지 W. 부시의 대선 참모로 참여하기 전까지 라이스가 강의와 더불어 힘을 쏟은 또 다른 분야가 바로 기업들에 대한 자문활동이었다. 그는 다국적 석유회사인 셰브론과 거대 보험회사인 트랜스 아메리카의 이사로 일했다. 금융분야에서도 그를 원해 찰스 스왑과 JP모건에 영입되기도 했다. 스탠퍼드에서의 여유있는 생활은 잊었던 취미를 되찾도록 해줬다. 그가 8년 간의 행복한 교수생활을 접고 다시 정치의 세계로 뛰어든 것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조지 W. 부시의 간청 때문이었다. 대통령 후보 시절의 부시는 외국이라고는 멕시코와 중국밖에는 가본 적이 없는 ‘외교 문외한’이었다. 유능한 외교 참모가 절실했던 그가 선택한 인물이 바로 라이스였다. 흑인에다 여성인 라이스의 발탁은 선거전략상으로도 의미 있는 조치였다. 결국 부시는 선거에서 이겼고, 라이스는 ‘최초의 흑인 여성 안보보좌관’으로 주목받으며 백악관에 입성했다. 그는 아침 6시 반에 출근해 밤 9시까지 일해야 하는 격무를 소화하며 부시의 큰 신임을 얻게 된다. 2001년 9.11테러가 발생하면서 그의 정치적 비중과 중요성은 역대 어느 안보보좌관보다 커졌다. 안보보좌관 시절의 라이스에 대한 부시의 신임이 얼마나 컸는지를 엿보게 하는 에피소드는 많다. 대표적인 것이 부시가 그의 권한을 대폭 확대하려 했던 것이다. 부시는 라이스를 군사 문제는 물론 대테러 문제까지 주관하는 보좌관으로 임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나서서 ‘법적으로 군사 문제를 주관하는 대통령 보좌관은 합참의장뿐’이라는 메모를 부시에게 보내고서야 이를 막았다는 후문이다. 콘돌리자 라이스는 의회 인준 절차를 거쳐 국무장관에 정식 취임. 그가 취임하므로 미국의 외교 노선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대학생 때부터 ‘힘의 외교’ 이론에 심취했던 터여서 비둘기파로 평가돼온 파월 국무장관에 비해 ‘강성외교’를 선호하리라는 예상은 큰 무리가 아니다. 그가 취임하면 미국의 외교 기조는 중동과 핵 문제에 대해 더욱 강경해지리라는 것이 워싱턴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라이스를 ‘강경과 온건이라는 이분법적 잣대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실용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뉴욕타임스>는 ‘라이스는 6자회담을 통해 북한 핵 문제 해결을 모색한다는 점에서는 파월과 같은 노선이지만, 대북 문제와 관련해 미국의 양보를 요구하는 한국 정부의 주장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며 강경파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파월 때보다 부시 대통령의 의중을 더 많이 반영하리라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이렇게 썼다. ‘부시와 라이스의 관계는 닉슨과 키신저의 관계와 비교될 수 있다. 라이스와 키신저 모두 대통령과 유별나게 가까웠으며 국무부와 백악관을 모두 장악했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닉슨-키신저의 경우는 키신저가 닉슨의 외교정책을 움직였지만 부시-라이스의 관계에서는 부시가 라이스를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대통령과의 특수관계가 큰 힘이 될 것이라는 분석에도 불구하고 라이스가 미국 내만 해도 5,000명에 달하는 직원을 거느리고 전 세계 250여 공관과 사무소를 둔 국무부를 제대로 지휘할지에 대한 우려는 없지 않다. 국가안보보좌관 시절 라이스는 파월 국무장관과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외교정책을 놓고 다툴 때 중재에 나서기보다 부시의 최종 판단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 이유다. 국무장관에게 필요한 중재 능력에 의심이 간다는 말이다. 국무장관은 필요할 경우 대통령의 의견에도 정면으로 반대할 줄 알아야 하는 자리다. 하지만 라이스는 대체로 부시의 의견에 따르는 자세를 취해온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정반대의 시각도 있다. 그가 인종차별이 횡행하던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도 전혀 기가 꺾이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국무장관에 취임하면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라이스 국무장관 체제에서 북한 문제는 어떻게 풀릴 것인가? 라이스는 지난 7월 방한했을 때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북한이 국제 감시를 받으며 진정한 핵 폐기를 결정한다면 얼마나 많은 것이 가능하게 될지 아마 놀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은 6자회담에서 전략적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왔다’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와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북한에 대해 ‘채찍’이 아닌 ‘당근’을 제시하면서 평화적 수단을 통해 북핵 해결을 모색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한 달 뒤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였다. 북한이 소위 ‘리비아 모델’을 거부하자 강력한 어조로 북한을 위협한 것이다. 그는 ‘북한 핵 프로그램을 분쇄하기 위해 은밀한 조치를 포함한 많은 수단을 검토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제 라이스의 어떤 외교 심판을 저울질하는 북한은 11일 “형식에 구애받지 않겠다.” “우리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며 다자회담의 의미를 묵살하는 공식보도를 한 상태다.

김영기자kysw777@hanmail.net

2005-03-03, HIT : 15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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