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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본사 정미숙이사 ‘부산일보 올해 신춘문예 당선작’
여성, 환멸을 넘어선 불멸의 기호 서영은論 - 정미숙 그녀의 소설은 남성이 배려된 여성 이야기 남성이 먼저 이해된 여성 서사이다 1. 서영은이 놓인 자리 서영은(徐永恩:1943~)은 올해로 화갑을 맞았고 등단 삼십 오년을 지났다. 지금쯤 장식될 법한 원로란 부호는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생의 현상과 본질, 이면과 진실의 틈새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그녀의 촉수는 여전히 젊다. 1968년《사상계》에 ‘교(橋)’로 등단한 이래 한동안 그녀는 남성화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교(橋)’’나와 ‘나’’’타인의 우물’ 등) 일상의 비루함과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남녀의 섹슈얼리티를 서술해 왔다. 많은 여성작가들이 처녀작에서부터 작가와 화자의 젠더를 일치시키는 자전적인 소설쓰기로 서사의 포문을 여는 데 비하여 서영은은 남성화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일별하고 한참을 돌아 ‘먼 그대’(1983)에 이르러 여성화자 ‘문자’를 찾아 세운다. 단순한 현상인 듯하나 작가와 젠더의 불일치에서 일치로의 이행은 서영은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녀의 소설은 남성이 배려된 여성 이야기 혹은 남성이 먼저 이해된 여성 서사이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서영은 소설의 여성들은 중심과 제도적 권력인 결혼에서 소외된 위험하거나 불온한 여성들로 연인, 정부, 첩이거나 처첩의 경계에서 A(Adultery)의 표지를 달고 있다. 이는 이 글의 텍스트인 ‘먼 그대’(1983)―’사다리가 놓인 창’(1989)―’꿈길에서 꿈길로’(1994)―’그녀의 여자’(2000)의 계보를 잇는 자전적 소설과 여타 여러 소설들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비슷한 여성들을 복제/변형하거나 사실을 재현·방어하면서 이어지는 이러한 소설들의 공통화제는 불륜적 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정체성 문제이다. 서영은은 이러한 여성들을 끈질기고 집요하게 주목하기 위해 동성간의 응시라는 시점 전략을 구사한다. 이 경우 인물들은 대개 화자/해설자/특권적 시선자와 초점화자/대상자/관찰되는 자로 양분된다. 이 글은 서영은이 천착한 성과 사랑, 결혼과 가족, 그 진실과 환영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그녀의 정체는 과연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남겨져 있는지 그 과정의 진실을 탐색하려 한다. 2. 여성, 비극적 경계인 ‘먼 그대’의 ‘문자’는 서영은 소설의 원형적 여성이다. 서영은 소설의 여성은 대체로 ‘문자’를 닮았다. ‘문자’의 정체는 애매하고 불온하다. 노처녀인 그녀는 사실 처녀가 ‘아니고’, 아이를 낳았으나 어머니도 ‘아니다’. 결혼생활을 하나 결혼하지도 ‘않았다’. ‘예’와 동시에 ‘아니오’인 비극적 경계인이 ‘문자’다. 그래서 그녀의 존재는 타인, 특히 동성의 여성들에게 ‘저렇게 될까 무서운’ 공포의 대상이 된다. ‘문자’의 소외는 이중으로 가중되어 있다. 그녀가 ‘등불‘이요 ‘신’이라 생각하는 ‘한수’가 나약하고 이기적인 ‘남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책임하고 유아적인 속물이자 ‘술주정꾼’이며 문자의 삶을 파괴하는 이다. 오물(abject)을 싸지르는 ‘그’에 투영된 문자는 또한 타자들의 눈에 ‘비체’(Abject)로 인식된다. 그녀는 독신녀/창녀의 경계에서 위태롭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의 선택은 독자들의 기대 지평을 뒤집는다. 서술자에 의해 제시되고 있는 ‘문자’의 내면이 읽는 이들을 당혹에 빠뜨리는 것이다. ‘문자’의 침묵은 ‘절대 긍정적 자신감’이고 그 확신은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존재’에게서 비롯한다. ‘문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네들’은 ‘무지’한 것으로, ‘한수’는 ‘시렁 위에 걸려 있는 등불‘로 정리된다. ‘시렁 위에 걸려 있는 등불‘은 무엇인가. 어두울 땐 길이고 빛이 되나, 밝고 따뜻할 땐 아무 소용에 닿지 않은 초라한 골동품 같은 것이 아닐까. ‘빛으로도 열기로도 인색한 것’에 메타포의 현실성이 있다. 그러나 ‘문자’는 여전히 그 비유에 사로잡혀 가슴을 펄럭인다. ‘먼 그대’에서 ‘문자’가 보이는 침묵은 현실에 대한 자기 방어이자 세상에 대한 불신과 저항이라 할 수 있다. 몸도 영혼도 아이도 다 빼앗겨버린 여성, 그러고도 언제든 고통에 무릎 꿇을 수 있다는 낙타의 등가물인 ‘문자’는 환멸과 절망을 미리 안 매저키스트이다. 매저키스트인 희생자는 화를 내면서도 내심으로는 자신에게 가해진 벌을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註:르네 지라르(김치수·송의경 옮김),’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한길사,2001),p.252.> 그녀가 화인(火印)처럼 붉은 주홍색 ‘A’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요구하지 않으며 제 탓으로 돌리는 ‘문자’의 자기 학대는 모든 고통의 사실상의 원인 제공자인 남성을 베일에 가리게 한다. 주관화된 연민과 순정의 파시즘으로 무장한 듯한 ‘문자’의 이미지는 우리 시대에 대안 없이 존재하는 여성군의 상징이다. 따라서 ‘문자’의 막막함과 침묵은 그녀의 입장과 삶의 태도로 보아야 한다. 부당하게 사랑했기에 ‘할 말이 없는’ ‘문자’의 상황은 ‘한수’와 더불어 우리가 요구한 희생양은 아닐까. 길을 잘못 든 속인처럼 만만한 그녀에게 몰아지는 가학을 통해 정렬을 재정비하는 일부일처제의 기만적 질서는 ‘문자’가 겨루는 고통이 크기에 계속될 것이다. 3. 경계를 허무는 웃음의 전략 ‘사다리가 놓인 창’의 표제는 상징적이다. 이는 소설 공간의 부당한 배치로 이어지는 전도된 질서를 암시한다. 이 소설에서 ‘인애엄마’는 앞서 보았던 ‘문자’의 복제에 가깝다. 그녀 또한 무책임한 사기꾼인 ‘그’를 위해 어머니의 역할마저 유보하며 헌신하는 여성이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모욕뿐이다. ‘문자’를 닮은 그녀는 ‘박상무의 아내/젊은 미망인/인애 엄마’ 등 그 어느 기호에도 적합성을 얻지 못한다. ‘박상무의 아내’(혹은 아내)라 호명되었으나 그에게 본처가 있는 까닭에 사실이 아니고,’젊은 미망인’이라는 명명은 남편 사별 이후 ‘박상무’와 수년간 동거생활을 하고 있는 그녀에게 민망한 용어일 뿐이다. ‘인애엄마’ 또한 그녀가 되찾은 이름이긴 하나 남편의 부재를 드러내는 기호이다. 이처럼 그녀의 현실은 모성/여성이 조화롭게 실현될 수 없다는 데서 신산스럽다. 부정의 기호인 그녀는 위치를 얻지 못한다. 이러한 그녀를 바라보는 화자 ‘나’는 그녀에 대하여 동정적인 입장을 갖는다. 그러나 ‘나’와 ‘그녀’는 정작 한 마디의 소통도 이루지 못하고 미지와 가능의 기호 ‘처녀’와 기지와 좌절의 기호 ‘첩’이 어긋나듯 헤어진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현실에 대한 환멸로 자살을 감행한다. 그러나 ‘나’는 거짓말처럼 살아난다. 이는 불우한 ‘인애엄마’를 위해 기꺼이 죽으려 했던 ‘나’의 태도 때문이라 해석된다. 웃으면서 자살을 택한 ‘나’에 의해 생존의 이유는 다시 분명해졌다. ‘나’가 현실의 아득한 장벽과 절망을 넘는 생존 전략으로 ‘웃음’을 선택한 것이다. 웃음은 바흐친이 역설했듯이 현실의 기만적 질서를 통쾌하게 무너뜨리는 민중의 힘이자 그것에서 비롯한 현실의 억압적 굴레를 가볍게 넘을 수 있는 태도와 전략이다. 놀랍게도 스물 한 살의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그녀에 향한 ‘애정’을 ‘웃음’과 연결시키며 극단에서 탈출한다. 극단의 끝에서 내면이 열리듯 ‘나’는 생을 도로 찾는다. 이 소설에서 화자인 ‘나’는 ‘인애엄마’의 고통을 ‘너무나 친숙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녀와 흡사한 인생을 걸어가야 할 운명’이 아닌가 의구할 만큼 그녀와 강렬한 동일시를 경험한다. ‘먼 그대’에서 ‘문자’가 세상에 대한 방어적 자세로 동성간의 소통 부재를 승인한 것과 달리 이 소설에서 순수한 화자 ‘나’에 의해 그 폐쇄회로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스스로 소외되고 보상 없이 힘든 여성들은 모두 자기와 같은 동일자라고 인식한다. 이 소설은 순수하고 도덕적인 화자 ‘나’의 자격으로 설득력을 갖는다. ‘나’는 구차한 것, 위선적인 것,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항거하고 저항하는 순수하고 도덕적인 인물이다. 무엇보다 ‘나’의 이 순수함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 편의적으로 사람을 구분하거나 경계 짓지 않겠다는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인애엄마’를 제도적 권력과 가부장적 기준으로 분류된 여성기호인 처/첩으로 구분하지 않는다.<註:N. 에니크(서민원 역),’여성의 상태’(동문선,1996),p.39.> ‘나’에게 그녀는 사랑을 잃은, 그리고 함정에 빠진 외롭고 가난한 한 ‘여성’일 뿐이다. 따라서 ‘나’의 자살기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몰인정한 현실, 그래서 인간의 존엄과 교신이 상실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거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세상과 인간 세사에 놓인 심연을 모른다. 남성이 친 빗장을 열고 여성들과 그녀들의 삶을 응시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슬프고 신비로운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 ‘인애엄마’의 후일담을 ‘나’는 짐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주어진 삶의 무거운 짐을 회피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자신을 세운다. ‘나’는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높은 곳에 사는 남성’이 내미는 손을 단호히 거절하고, 더 높고 깊어진 안목으로 세상을 읽기 위해 부끄러움과 주저를 버리고, ‘더 불어날 사다리’의 두려움과 혼돈을 떨치며 당당히 나선다. 4. 제 3의 성, 모순의 기호 ‘꿈길에서 꿈길로’에 등장하는 두 여성은 모두 연애와 결혼의 과정을 거친 성숙한 여인들로 자격을 같이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주부이자 잘 나가는 기자인 ‘나’(박희주)는 ‘한진옥’에 대한 선입견을 쉽게 무너뜨리지 않으며 이를 ‘본능적 거부감’과 ‘당혹감’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둘은 ‘사랑에 실패한 여자’로 묶여진다. ‘한진옥’의 딜레마는 그녀가 여전히 ‘황진이/아내’의 경계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황진이’는 요부이나 그녀를 만든 것은 남성들의 요구라고 이해하며 나아가 황진이가 많은 여인들의 적수이나 그녀를 없앤다 해도 남성들의 요구와 욕망에 따라 황진이와 같은 여성은 끊임없이 생길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화자인 ‘나’는 이러한 ‘한진옥’과 황진이를 동일시하면서 그녀를 ‘여자/남자, 아픔/사랑, 아내/황진이’ 등을 모두 포괄하는 ‘제삼의 성(性)’으로 인식하고 그녀로 인해서 ‘나’(우리)가 ‘삶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항할 수 있는 ‘창’과 ‘방패’를 동시에 획득한 것’으로 여긴다. 예사로운 듯하나, 기실 가학적이고 모멸적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창과 방패’는 문자대로 ‘모순(矛盾)’이 아닌가. 배제된 혹은 희생된 황진이(/한진옥)를 통해 우리들 가운데 누가 폭력에서 피해갈 수 있었는가. ‘그녀’는 우리들의 삶을 위해 마련된 ‘희생양’인가. ‘한진옥’은 끝내 이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다. 여기서 ‘한진옥’은 자신의 출구를 ‘동성애적 포즈’에 담는다. ‘동성애적 포즈’라 함은 그녀의 동성애적 태도가 이성애와 가부장제에 대한 확고한 반발에서 출발하고 있지 못하다는 의미이다. 그녀는 ‘부취’(butch; 동성애 관계에서 남성역을 맡는 사람)로, 상대 여성은 모든 소외된 여성이 된다. 그래서 그녀의 동성애는 이미지(image)이다. 여행을 떠날 때 늘 복장을 남/여 두 종류로 준비하는 그녀는 성(sex/gender)의 구분을 초월하려 한다. 그러나 전제했듯이 이성애와 가부장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여성적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전략과 실천의 의미를 갖지는 못한다. ‘남성성 연습’ 혹은 ‘여성 이해’에 그 의미가 모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여성은 약하고 힘없는 자라는 타자성에의 시인(是認)은 있으나 그것을 넘어설 현실적 대안은 부재한 가운데 ‘내 속에서 태어난 남성’으로 소외된 여성들, ‘누님들의 남근(phallus)’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 경우 젠더 역할의 연기(演技)는 여성이나 남성의 복장 도착과 다를 바 없다. ‘한진옥’은 ‘힘’과 ‘자유’를 역설하고 이어 그녀가 평생 ‘그의 여자’였음을 굳이 고백하는 순정의 모습을 보인 후 ‘바리데기 공주’를 쳐든다. 문자― 황진이―바리데기공주의 순환은 위태롭다. 그 어디에도 여성이 주체적으로 행복을 개척한 지경은 없다. 있다면 ‘운명의 꽃’을 피우듯 견디어 내는 것일 뿐이다. 세속의 속악한 논리와 이기를 모두 초월한 듯한 과장의 포즈! 부취의 동성애적 포즈를 통한 젠더 허물기가 이미지의 관념에 불과했듯 서영은의 고독과 절망은 현실적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고 쉽사리 찾을 대안도 없는 듯하다. 5. 향락의 전이와 경계 서영은은 자신의 첫 장편인 ‘그녀의 여자’를 일컬어 ‘삶의 페허에서 벌인 굿’이라 하였다. ‘굿’은 ‘해원(解寃)’을 향한 ‘이별의식’인 법. 이 소설에 이르러 그녀는 죽어 다시 태어난다. 남편을 잃고 실의에 빠져있던 중년의 여성 ‘현석화’는 마치 운명처럼 아들의 친구이자 연인인 ‘나’(방소연)를 만난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끌려 그녀들의 관계는 동성애적 코드로 변주된다. 지금껏 ‘연민’과 ‘사랑’의 동일시로 이어지고, ‘동성애적 포즈’로 젠더의 경계를 관념적으로 넘나들던 작가의 우애적 여성연대는 이곳에 이르러 위반의 장인 ‘동성애’(Lesbianism)로 치닫는다. 현석화는 남편이 자신에게 줄 수 없었던 사랑의 절대성을 ‘소연’에게 주겠다고 했으나 진작 그녀가 줄 수 있는 것은 물질과 ‘소연’이 원치 않는 성적 관계이다. 그녀의 성애는 그녀의 것이 아니라 남편이 그녀에게 주었던 향락의 ‘모방’이다. 놀랍게도 ‘현석화’는, 남성 중심의 야만 사회에서 남근 중심의 향락만을 알도록 하기 위해 클리토리스를 할례했던 의도된 무지와 닮아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발화하는 ‘진실’ ‘절대’ ‘영원한 사랑’은 무엇인가. 그녀는 죽은 남편에 동일시되어 그녀 자신인 ‘소연’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명백한 전이이다. ‘현석화’의 욕망과 ‘소연’의 그것은 궁극적으로 만날 수 없다. 그래서 ‘현석화’는 마침내 자살한다. 그리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기에 떠돌았으나 다시 그대로 돌아왔던 포(Poe)의 ‘도둑맞은 편지’처럼 ‘어머니’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현석화’의 죽음은 간단하지 않다. 이는 이것이 서영은 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예고하는 서막이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미 살폈듯이 주변과 경계(境界)에 있는 서영은의 여성들은 정체의 장애로 침묵하고 도피하거나 아니면 힘과 자유를 역설하며 모든 고통을 초월한 듯한 포즈를 힘겹게 견지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 이르러 작가는 파격적이고 일탈적인 동성애적 코드를 창출한다. 물론 그녀의 행위가 그를 ‘모방’하는 도착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녀의 ‘자살’은 남성의 망령에서 벗어남을 상징하는 실천적 행위의 의미로 볼 수 있다. 환멸을 ‘미리 안 자’는 마조히스트가 되고 끝내 그 결말이 절망일 때 위치를 바꿔 사디스트가 된다. 그래서 그 끝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간의 기묘한 ‘일치’를 우리는 목도한다. 이는 드러난 단순 모방이 목표가 아님을 의미하며 그것이 불행을 지나 자기들이 모방할 ‘강력한 존재’를 찾는다는 데 있음을 말해준다. ‘소연’에게 자신의 몸에서 ‘아브젝시옹’을 읽게 한 ‘현석화’의 진정한 의도는 수치와 혐오에 대한 경계(警戒)에 있다. 이는 곧 그녀와 다른 그녀, 강력한 존재인 새로운 여성상의 요구에 다를 바 없다. 타인의 시선 권력에 갇혀 관념의 관념으로 혹은 기만적 환영으로서 자신의 상황을 방어하기에 힘겨웠던 그녀는 환멸로 끝난 시간을 넘어 그녀가 욕망했던 ‘그녀’, 가능과 동경인 그 ‘불멸의 기호’로 거듭 태어날 것이다. ‘현석화’의 죽음은 ‘소연’의 선택을 분명하게 한다. ‘소연’은 과거의 ‘현석화’를 지나 현재와 미래에 닿아있는 새로운 여성상의 모습이다. 이것이 서영은이 ‘화자―그녀’의 응시를 넘어 대화를 통해 끈질기게 추구한 서사의 전망이다. ‘현석화’를 딛고 수없이 불어난 ‘나’는 펼쳐진 생 앞에 ‘문자’가 그러했듯 가슴을 펄럭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 한다.

.(.)

2004-02-26, HIT : 15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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