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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16]여성의 역사를 남긴 사람들-나혜석


한국 최초의 근대 여성화가이자 페미니스트
20C 초반을 장식한 ‘신여성’으로 평가돼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경기도 수원에서 구한말 군수 집안, 나기정(羅基貞)의 5남매 중 2녀로 출생하였다. 14세에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오빠의 권유로 일본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계속 공부하였다.

 

♠ 동경 유학, 귀국 후 3·1운동에 참여


1914년 일본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學之光)」에 '이상적 부인(婦人)'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여권 운동에 앞장섰다. 1917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를 발간하였다. 이 회보 2호에 발표한 단편 '경희'는 여성적 자아의 발견을 주제로 한 원고지 140매의 작품이다. 김명순의 '의심의 소녀'(1917년 11월)보다 4개월 늦었으나 김동인, 염상섭보다 1년 앞선 본격적인 여성소설 1호이다. 그녀의 작품 총 6편 가운데 서간체 소설과 단편소설은 문학사상(文學史上) 그림 못지 않은 위치를 인정 받고 있다.

 

♠ 사랑과 결혼, 미술 작품 제작에 열중


동경 유학 시절 이광수와도 염문이 있었으나 결국 김우영과 1920년 결혼하였다. 이때 그는 첫 애인 최승구의 무덤을 찾아 비석 세우기를 요청, 약혼자의 승낙을 받아내고 자신의 과거를 청산할만큼 자신만만했다. 또한 결혼 때 그가 내건 세 가지 조건은 오늘의 여성도 감히 내세우기 어려운 것이었다.

 

즉 일생을 두고 자신을 사랑할 것과 그림 그리는 일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해 둘만이 살 것 등이었다. 이 모든 조건을 쾌히 승낙한 10세 연상의 변호사와의 생활은 말 그대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문예지 「폐허(廢墟)」의 창간 동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화가로서도 치열한 창작열을 불살랐다. 1921년 3월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유화 70점으로 서울 최초의 개인 유화전을 개최하여 호평을 받았다.


1922년부터 고희동과 함께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농가'와 '봄'두 작품을 출품하였다. 1923년에는 남편이 일본외무성 만주 안동현 부영사로 임명되어 만주에서 살았다. 그 해 제2회 선전에서 '봉황성의 남문'이 4등 입선했다. 서양화 그룹 고려미술회 창립 동인이 되었고, 1924년 제3회 선전에 '가을의 정원' 등을 출품하여 4등 수상했고 1927년 제6회 선전에 '봄의 오후'를 출품하고 남편과 세계 일주를 시작하였다.

 

♠ 파리에서 수업한 최초의 한국 서양화가


남편과 세계일주를 하다가 혼자 파리에 남아 8개월간 그곳의 야수파 미술을 공부하였다. 1929년 미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거쳐 3월에 귀국하여 수원 불교포교당에서 귀국개인전을 개최하였다. 이어서 1930년 제9회 선전에'화가촌' '어린이'등을 출품하고 1931년 제10회 선전에 '정원'을 출품하여 특선을 차지했다. 계속해서 1932년 제11회 선전에 '금강산만물상' '소녀' '창에서' 등을 출품하고, 세계일주 기행문 '구미유기(歐美遊記)'를 잡지 「삼천리(三千里)」에 연재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생애는 문인으로 보다는 아무래도 화가로서 빛을 발한다. 첫 개인전 당시 한국에는 고희동 등 10명 이내의 서양화가가 활동하였을 뿐이었다. 그녀는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며 천부적인 재능으로 조형어법(造形語法)의 바탕을 다져 나갔다.


특히, 그녀는 파리의 야수파계 미술연구소에서 새로운 예술성에 눈을 떴다. 사실을 주관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 활달한 필치와 자유분방한 색채로 표현해냈다. 유럽의 박물관과 미술관의 엄청난 유산을 통해 30대 초반의 여류화가는 국내 어느 화가도 접하지 못한 감동을 맛보고 이를 재창조해낸 것이다.

 

♠ 투철한 여성해방론자



나혜석의 여성해방에 대한 관심은 일찍부터 폭넓은 인간관계와 사회적 경험에서 자연스레 싹튼 것이었다. 그녀는 1921년에 일찌기 가부장제의 억압에 있는 여성의 처지를 시 '인형의 집'으로 묘사, 매일신보에 발표한 바 있다. 또 1924년부터 26년까지 그녀는 김일엽의 여성의복 개량에 대해 동아일보에 4회에 걸쳐 논쟁, 미술가적 안목으로 조선옷의 특색을 살리자는 비판적 대안을 제시하였다.


중국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한 여권운동가를 만나 "여성은 위대한 것이오, 행복된 자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녀는 남녀관계, 여성의 지위 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해답을 얻기 위해 혼자 계속 파리에 남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때마침 그곳에 온 천도교 지도자 최린(崔麟)을 만나 파리 시내 관광 등을 안내하면서부터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귀국후 그녀는 여행기 '구미유기'에서 영국 참정권 운동에 참여한 영국여성운동가의 활약을 알렸다. 인간평등에 기초한 참정권운동뿐만 아니라 노동, 정조, 이혼, 산아제한, 시험결혼 등 여성문제를 소개하였다.


1935년에는 사회적 비난과 생활고 속에 방황하며 '신생활에 들면서'를 발표하였다.
"사 남매의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라"
일찍 핀 매화는 꽃샘 추위에 얼어 죽는다던가. 안타깝게도 당시 사회는 결코 이같은 그녀의 급진적 개방사상을 수용할 수 없었다.

 

♠ 고독과 질병으로 쓰러져


1933년 나혜석은 고향인 수원에서 미술연구소 여자미술학사를 운영하였다. 한편으로는 「삼천리(三千里)」와 「신동아(新東亞」에 기행문과 수상(隨想)등을 발표하였다. 그 같은 집필활동은 미술활동을 중단하고 문인으로 전향한 듯하였으나 본업은 여전히 미술 창작이었다.


1935년 서울 조선관 전시장에서 개최된 소품전에 100여점을 출품하였다. 그러나 미술계에서는 물론 일반사람들로부터 철저히 외면 당하였다. 즉 1931년 봄에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한 그녀는 자신이 상상도 못했던 일로 사람으로 태어난 걸 후회할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때 나이 36세, 3남1녀의 어머니였던 그는 결혼 11년만에 거리로 쫓겨나는 부당함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사회의 이목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며 더 큰 좌절과 고독에 몸부림쳐야 했다.


그녀는 41세에 본의 아닌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충남 수덕사로 김일엽을 방문하였으나 생각이 다른 두 여성이 함께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오랜 방황에 지칠대로 지쳐 완전히 폐인과같았던 1946년 어느 날인지도 모르게 행려병자로 서울 자혜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나혜석은 소지품 하나 없이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단지 1948년 「관보(官報)」에 그 유명한 이름 석자도 없이 53세 사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완전히 잊혀진 한낱 가엾은 여인으로 그녀의 화려한 생애는 막을 내렸다.


1995년 미술의 해를 기념, 고향 수원의 경기도 문화예술회관에서 나혜석 예술제가 개최되었다. 이때 경기도는 매년 4월 예술제를 열고 또 기념관과 동상을 건립하고 미술상을 제정하는 등 나혜석을 항구적으로 기리기로 하였다. 이제 그녀는 윤심덕, 김일엽 등과 함께 20세기 초반을 장식한 신여성으로서 자리매김되었다. 뿐만 아니라 근대 양화 여성화가 1호로, 연대기상 1호만의 중요성 이상으로 그 '발군(拔群)의 화격(畵格)'은 공인 받고 있다.

 

자료정리/김옥련기자

2006-08-10, HIT :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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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환   2010-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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