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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11] 여성의 역사를 남긴 사람들-윤심덕



최초의 여류 소프라노, 20세기 최고의 신여성 윤심덕


‘사의 찬미(死의 讚美)’ 그녀를 불멸의 가수로 자리매김 시켜

 

훤칠한 용모에 짙은 화장, 화려한 최신유행의 옷에 뾰족구두를 신고 1920년대 서울과 동경 거리를 활보했던 우리나라 20세기 신여성 윤심덕. 그녀는 ‘한국 여성 기네스 북’의 최다 등장인물일 것이다. 최초의 여성 국비 유학생, 최초의 여류 소프라노 성악가, 최초의 대중 가수, 당대 최다 레코드 판매량을 보유한 가수, 방송국 사회자, 최신 패션 모델, 죽음의 길에 남자를 동반할 수 있었던 여자 등 그녀를 수식하는 ‘선각자’라는 단어답게 각종 기록들을 세웠던 인물이었다.

 

♠ 평양에서 태어난 최초의 여류 성악가

 

윤심덕은 평양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호병(尹皓炳)은 가계점원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전도사인 어머니는 외국인 여의사 병원에서 사무원으로 맞벌이를 해야 할 정도로 가계는 어려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머니는 생명력이 강한 평안도 여성답게 성격이 활달하고 적극적이어서 주위에서 자기 주장이 강하다고 흉볼 정도로 집안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갔다 한다. 교육을 통해 계급상승을 꾀했던 어머니는 일남삼녀의 자식들을 모두 대학에 진학시키고 윤심덕을 동경으로까지 선뜻 유학보낼 정도로 교육열이 강했다.


어머니의 강한 성격을 닮은 윤심덕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진보적인 평안도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던 탓에 경쟁적이고 개방적이며 적극적인 현대산업사회의 전형적인 성격을 형성할 수 있었다. 1918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원주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잠시 있다가 1919년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우리나라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동경 음악학교 사범과에서 성악을 전공하였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지나치게 활발하여 ‘왈패’라는 별명을 가졌던 그녀는 남자들이 그녀를 여자로 얕보고 희롱하였다가 큰 코를 다친 일화들과 함께 그녀의 성격은 “모든 것이 해탈적이요, 가면이 없어서 무슨 일에든지 남의 주목과 비평같은 것은 조금도 꺼리는 법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순하고 희생적이며 유교적인 정숙한 여인상이 추앙받고 있던 그 시대에, 사회통념에 정면으로 부딪쳐 자신의 소신과 감각에 따라 살고 경쟁을 즐기고 자유로운 그녀의 성격에서 서구 자유주의 여성해방론을 수용하고 실천할 수 있던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사의 찬미’로 가수로 성공


조선 총독부의 ‘일선융화’정책에 따라 실시하던 관비유학생 시험에 최초의 여자 장학생으로 뽑혀 동경음악학교 사범과에 유학하게 된 윤심덕은 총독부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과 음악 전문가 과정이 아닌 교사 양성과정을 이수했다는 점이 윤심덕의 음악가로서의 한계와 정치 사회적 인식의 한계를 결정지었다 할 수 있다. 즉 총독부의 수혜를 입은 윤심덕은 식민지 민족의 현실은 외면한 채 일본유학을 통해서 서구의 부르조아 여성해방론을 수용하였다. 이로 인해 그녀는 총독부의 식민지 여성 착취와 억압의 사회 경제적 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은 갖지 못한 채 여성에 대한 봉건적 인습만을 주요 문제로 느끼게 되었다.


1923년 동경음악학교에서 금의환향한 윤심덕은 동아부인상회 창립 3주년 기념음악회를 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하였다. 정식 독창회는 아니었지만 초청음악회를 통해 경성 악단의 신데렐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녀는‘문화의 불모지’인 조선에 서양음악을 꽃피우겠다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여성단체들과 문화사회단체들의 초청으로 오늘은 평양, 내일은 서울하는 식으로 성악발표에 동분서주하였다. 그녀의 노래에 대해 언론에서는  “밤 지난 해당의 붉은 화관이 아침 이슬에 젖은 듯한 오렌지 빛 작은 입술로 옥반(玉盤)에 구르는 구슬소리와 같이 곱고도 청아한 멜로디를 울리어 반도악단의 한없는 총애를 받고 있다.” (동아일보 1923. 12. 17) 라고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녀는 출연료에 개의치 않고 자선음악회와 학교음악회에도 열심히 출연하였는데, 실제로 그녀가 빠지면 그녀를 대신할 만한 성악가가 없었고 조선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는 그녀는 최고의 광고소재였으므로 서로 다투어 그녀를 끌어가려고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연습부족과 프로의식의 부재, 스캔달로 점철된 사생활 및 오만한 무대 매너로 인해 악평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윤심덕 자신도 예술적 혼의 고갈보다는 자신을 알아주지 못하는 시대와 사회 탓으로 돌리고 좌절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세계적 음악가가 되어보겠다는 포부로 여러번 고전음악의 고향인 독일, 이태리 유학을 기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때 1925년에는 악계에서 극단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극작가이자 그녀의 애인인 김우진의 영향을 받아 조선에 연극을 토착화시키는 신극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토월회에 여배우로 무대에 섰다. 배우를 광대로 천시하던 그 당시에 조선 최고의 성악가 윤심덕이 지망했다는 것은 온 장안의 화제거리였다. 선구자적인 소명의식을 발휘하여 자신이 성악가로 쌓아왔던 명성과 지위도 버리고 여배우직에 도전했지만 역부족으로 몇 차례의 연극에서 호평을 받지 못하고 배우로서의 종지부를 찍었다.


역시 그녀에게 가장 잘 어울렸고 실력을 최대로 빌휘할 수 있었던 것은 노래였다. 그녀는 음악가로서의 명성을 이용하여 방송국에 출연하여 노래도 부르고 사회도 보는 방송인으로서의 새 길을 개척하였다. 일반인들이 좋아하고 쉽게 들을 수 있는 대중적인 노래를 주로 불렀다. 그녀의 노래가 전파를 타면서 전국적인 대중음악가로서의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런 자신에 대해 별 자부심이 없었던 듯 싶다. 단지 생계유지의 일환으로만 생각하고 순수음악과 이태리 유학에 대한 미련과 갈망은 버리지 못했던 듯 싶다. 윤심덕은 1925년 이토(日東)레코드 회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어여뿐 색시,’ ‘메기의 추억’ ‘나와 너,’ ‘아 그것이 사랑인가,’ ‘어머니 부르신다,’ ‘망향가,’ ‘방긋웃는 월계화’ 등 7곡의 우리말로 된 가요를 취입하여 최초의 레코드 취입가수가 되었다.


특히 1926년 이바노비치(1845-1902)의 ‘다뉴브강의 잔물결’ 이라는 왈츠 곡에 그녀가 작사하고 노래한 ‘사의 찬미(死의 讚美)’는 그녀를 불멸의 가수로 자리매김하게 하였다. 이 노래는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더욱 극적인 광고효과를 가져와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숫자인 10만 매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우리 나라 최초의 히트곡이었던 사의 찬미는 염세주의적이고 현실 도피적이며 일면 생에 대한 좌절을 읊으면서 죽음을 예찬하는 것 같지만, ‘죽음을 직시하면 삶이 보인다’는 역설처럼 생에 대한 집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영탄조 가요인 이 음악은 3ㆍ1 독립운동의 실패로 실의와 좌절에 빠져 있던 우리 민족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데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 한국판 줄리엣과 로미오


자유연애에 최고 가치를 두었던 유명 스타 윤심덕은 30세라는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사생활에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자유연애론을 외치던 그녀는 ‘사랑해서는 안될’ 유부남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동경 유학시절부터 알고 지내 온 목포 갑부의 아들 김우진으로 유능한 극작가로서의 장래가 촉망되었던 인텔리였다. 고향에 처자를 둔 유부남과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었지만 사랑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명의식(?) 때문에 그녀는 김우진과의 동거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사랑과 예술에 승부를 걸고자 했지만 돌아온 것은 사회의 몰이해와 지탄이었으며, 이로 인해 그들의 연극의 꿈마저 산산조각이 났고 성악가로서의 길도 절망의 나락에 빠져들었다. 가중되는 생활의 궁핍과 삶의 무게 때문에 그녀는 좌절감과 고독감에 휩싸이곤 하였다. 김우진 또한 자신의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윤심덕과 결혼할 만한 용기나 완고한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극작가의 길을 갈 용기가 없었다. 선각자로서의 자부심이 만신창이가 된 그들에게 주어진 길이라곤 자살밖에 없었던 듯 싶다. 현해탄에 몸을 던짐으로서 자유주의적 삶과 사고를 수용하지 못했던 우리사회에 무언의 항의를 하였고 한국판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죽음으로써 승화시켰던 것이었다.

최경연기자(womenisnews@hanmail.net)

2006-06-05, HIT :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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