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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9]여성의 역사를 남긴 사람들-평강공주


평강공주 ‘바보’를 천하 용장으로 만들다


능력과 용기 결단의 내조자



고구려 제25대 평원왕(559-589 재위) 때는 중국에서는 통일왕조인 진(晋)이 망하고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로서 여러 나라가 계속 생겼다가는 사라져가는 혼란한 시기였다.


신라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시기로서 제25대 진흥왕(540-576 재위)에서 진지왕을(576-579 재위)을 거쳐 진평왕(579-632 재위)에 이르는 시기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는 북쪽에서는 이민족이 세력팽창을 하며 고구려를 괴롭히고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연합하여 고구려의 남쪽 영역을 침범하여 빼앗으며 팽팽하게 서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자청하여 바보 온달의 아내가 되어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平岡公主)가 어렸을 때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농담으로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 없고, 바보온달(溫達, ? -590)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 고 늘 이야기하였다.


공주의 나이가 16세가 되니 평원왕은 귀족인 고씨(高氏)에게로 시집 보내려 하였다. 그러자 공주가 말하기를,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하셨는데,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필부(匹夫)들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 하물며 지존(至尊)의 지위에 있는데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왕의 지위에 있는 자는 희언(戱言)이 없다.’ 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된 것이오니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고 하였다.

 

왕이 화가 나서 이르기를
“네가 나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진실로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가 있겠느냐? 너는 갈 데로 가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공주는 보물 팔지 수십개를 팔꿈치에 메고 궁궐을 나와 혼자 가다가 사람에게 물어 온달의 집에 이르렀다. 눈 먼 노모(老母)가 있음을 보고 가까이 가서 절하고, 온달이 있는 곳을 물으니 노모가 대답하기를, “우리 아들은 가난하고 추하여 귀인(貴人)이 가까이 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좋고 손을 만지니 부드러운데 반드시 천하의 귀인이요.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아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산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하였다.


공주가 산 밑에 다다르니,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고 공주가 마음 속에 품은 생각을 말하였다. 온달이 성을 내며 “이는 어린 여자의 행동할 바가 아니다. 반드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이다. 내곁에 오지 말라.” 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
공주는 혼자 온달의 집으로 돌아와 사립문 아래에서 자고 이튿날 다시 들어가서 모자(母子)에게 자세한 것을 말하였는데, 온달은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내 자식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귀인이 거처할 곳이 못되오.” 하였다.


공주가 대답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한 말 곡식도 방아 찧을 수 있고, 한자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만 같다면 어찌 반드시 부귀한 후에야 함께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고, 금팔찌를 팔아서 밭과 집, 노비, 소와 말 그리고 기물(器物)들을 사서 살림을 모두 갖추었다.


말을 살 때에 공주가 온달에게 이르기를


“시장에서 파는 사람의 말을 사지 말고 꼭 국마(國馬)를 택하되 병들고 파리해서 내다 파는 것을 사오도록 하시오.” 하였다.


온달이 그 말대로 하니, 공주가 말을 잘 먹여서 말이 날마다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에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날 잡은 산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신(山川神)에 제사를 지내는데, 그날이 되면 왕이 나가 사냥하고 여러 신하들과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다. 이에 온달도 공주가 기른 말을 타고 따라 갔는데 온달이 빨리 달리고 잡은 짐승도 많아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왕이 그를 불러 이름을 물어보고는 놀라기도 하고 또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 561- 578 재위)가 요동을 침범하니 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싸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크게 이겼다. 공(功)을 논할 때에 모두가 온달을 제일로 삼았다. 왕이 기쁘고 감탄하여 온달을 드디어 사위로 인정하여 예(禮)를 갖추고 맞이하며 높은 작위도 주었다. 그리하여 온달은 위엄과 권세를 모두 갖추었다.

 

신분을 초월한 그들의 사랑은
세월을 넘어 아직도 큰 감동으로....

 



온달 고구려 제일의 장수가 되어


몹시 가난하여 옷과 신발은 모두 헤진 것이었으며 먹을 것도 없어 밥을 빌어다 어머니를 봉양하고 산에서 나무 껍질을 벗겨다 먹던 온달을 위엄과 권세를 지닌 고구려의 귀족으로 만든 것은 평강공주의 능력과 뒷받침 때문이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즉 공주는 좋은 말을 고를 줄 알고 키울 줄을 아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공주가 바보 온달을 만나게 된 것은 지존의 위치에 있는 왕이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물론 사랑스러운 귀여운 딸의 울음버릇을 고치기 위해 평원왕은 가벼운 생각으로 한 말이었지만,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큰 덕목은 ‘신뢰’ 이다.

 

평강공주는 부왕(父王)을 훌륭한 왕으로서 말에 대한 책임을 중시하여 신뢰할 수 있는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온달을 찾아갔으며, 그리고 결국은 온달을 위엄과 권세를 갖춘 훌륭한 장수로 만들었다.


가난하여 누추한 온달의 집에 가서 눈 먼 노모에게 귀한 공주의 신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절을 하였다는 것에서도 평강공주의 신분을 뛰어넘는 인간적인 모습과, 포용력과, 한 번 먹은 마음에 대한 변함없는 실천력을 보여주고 있다. 온달과 그 어머니가 공주를 받아들이지 않자 사립문 밖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또한 거부하는 모자(母子)를 끝까지 설득하는 모습에서도 더욱 그녀의 훌륭한 모습은 드러난다.


그리하여 온달은 한족(漢族)이 요동을 침범하였을 때 고구려의 장수로서 무공(武功)을 세워 나라를 지켰으며, 590년(영양왕 1년)에 백제와 신라의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 지역과 죽령 이북 지역을 점령하였던,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고자 출정하였다가 아차성에서 전사하였다.


이와 같이 온달이 활약하였던 6세기 후반의 고구려는 북쪽에서는 한족(漢族)이,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서로 각축을 벌이며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여 오는 시기였다.


이러한 어려운 시기에 온달은 고구려를 대표하는 장수로서 이민족(里民族)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삼국의 요지로서 서로의 각축장이었던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자 최후의 힘을 다하였건 것이다. 이러한 온달장군의 활약 뒤에는 평강공주의 역할이 또한 작지 않았던 것이다.

 

신라군의 화살 맞아 온달사망


온달이 아차산성 아래에서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장례를 치루는데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않았다. 평강공주가 와서 관(棺)을 어루만지며, “사생(死生)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 하니, 드디어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온달이 전장으로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령(鷄立嶺: 지금의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고구려에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 아오지 않겠다.” 고 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죽어서도 관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라는 의미로 보인다. 평강공주가 뜻은 이루지 못하였더라도 괜찮으니 돌아가자고 하자 그 때서야 관이 움직였다는 표현으로 보아, 온달이 실지(失地)회복을 위해 출전하였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상황이 있었겠지만 평강공주의 위치와 역할도 많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가 대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처하였을 때 나라를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짊어진 온달 장군의 뒤에는 평강공주의 역할이 또한 컸음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공주의 이미지는 더없이 곱고 여리고 나약하고 귀하게만 생각되는데, 평강공주가 보여준 한국 고대의 공주는 왕의 위엄과 신뢰를 갖춰주기 위하여 혼자 몸으로 궁궐을 나와 누추한 온달의 집으로 갔으며, 그 곳에서도 받아주지 않자 문 밖에서 밤을 새우고도 끝까지 설득한 강인한 의지와 두려움 없는 실천력과 변치않는 결단력을 지닌 여성이었고, 좋은 말을 선택하고 병든 말을 잘 치료하고 건장하게 키우는 능력도 지닌 여성이었다. 온달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와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내조(內助)를 한 평강공주는 오늘날에도 한국의 모든 여성의 귀감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최경연기자(womenisnews@hanmail.net)

2006-05-10, HIT :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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