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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8] 여성의 역사를 남긴 사람들 '김활란'

한국여성교육의 발전과 한국의 복음화운동 위해 노력

교육자&여성운동가&종교인으로서 다방면에 지대한 공헌 남겨

 

일제의 지배하의 암흑기인 1931년 10월 한국 최초의 여성박사가 탄생했다. 이 땅의 소외 받은 여성들에게 가슴 벅찬 희망을 심어 준 주인공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우월(又月) 김활란(金活蘭)이었다. 김활란은 한국여성교육의 산 역사인 ‘이화’의 대명사이자 우리나라 여성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 인물이다. 구한 말에 태어나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많은 역경기(逆境期)를 헤쳐나간 김활란은 여성교육의 발전과 여성의 지위 향상, 농촌 계몽, 구국운동, 국제외교, 사회 봉사, 복음화 운동 등에 일생을 바쳤다. 그녀는 교육자로서 여성운동가로서 종교인으로서 다방면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화학당 대학과 졸업

 

김활란은 인천에서 김진연(金鎭淵)과 박또라의 8남매 중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그 해가 기해(己亥)년이었으므로 태어난 아기에게 기득(己得)이라는 아명이 붙여졌다. 신앙심이 돈독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김활란의 나이 7세 때 전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김활란에게는 헬렌이라는 세례명이 주어졌다. 그리고 학교에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헬렌이라는 세례명을 한자식으로 활란이라고 고쳐불렀다.

 

인천의 모 상회에서 경리였던 그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진취적인 성향의 인물이었다. 어머니 박씨도 딸들을 공부시키는 데 열성적이었으므로 김활란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고등교육을 받았다. 9살 때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자 김활란은 두 언니와 함께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고등과를 졸업한 김활란은 이어 대학과에 진학하여 1918년에 졸업한 후 이화학당의 교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화학당 대학과 재학 중에 김활란은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경험하고 여성에게 주어진 인습의 굴레를 인식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그녀는 깊은 신앙의 체험을 통해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암흑 속을 걷는 한국여성의 앞 길을 닦는 일’ 이라 확신하고 일생을 여성교육에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1918년 3월 정동예배당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여자의 고등교육과 가정」이라는 졸업논문을 가지고 우리말과 영어로 강연을 하여 많은 청중의 갈채를 받았다.

 

3ㆍ1운동에 참가한 후 미국으로 유학

 

이화학당의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9년 3ㆍ1운동을 맞았다. 김활란은 동료 교사 박인덕(朴仁德, 1897~1980), 신줄리아 등과 함께 비밀결사를 주도하였다. 학교와 교회, 여성단체에서 모은 독립운동 자금을 전달하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그러나 함께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동료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쫓기던 김활란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피신할 수 있었다.

 

그 후 김활란은 1920년 6월부터 뜻을 같이 하는 제자들과 함께 ‘인류를 위해 죽은 예수의 뜻을 받들어 민족을 위해 필요할 때는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정신을 기르자’는 각오로 ‘7인 전도대’를 조직하였다. 평양ㆍ신의주ㆍ안주 등지를 순회하며 농촌계몽과 복음 전도활동으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1922년 4월에는 북경에서 열린 세계 기독교 학생 대회에 김필례와 함께 참가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여성으로서 국제회의에 참석한 최초의 일로서 한국 YMCA연맹 창립의 계기가 되었다.

 

그 해 7월에는 선교사들의 추천을 받아 도미(渡美)한 김활란은 오하이오 웨슬레안 대학 3학년에 편입하여 최우등으로 졸업하였다. 다시 보스톤 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 진학하여 ‘철학과 종교의 관련성’이라는 제목으로 석사논문을 쓰고 귀국했다.

 

 적극적으로 사회활동 펼쳐

 

다시 이화에 복직하여 영어와 종교를 가르쳤다. 학감직을 맡아 학교 행정에 참여하면서 교과과정을 정비하였다. 또한 일본에 대한 국민적 저항운동이 계속되면서 지식인들, YMCA, YWCA의 계몽단체가 농촌부흥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특히 YWCA는 김활란이 중국 북경에서 열린 기독학생연합회에 참석한 후 한국 여성의 지위 향상과 계몽을 위해 창설을 주도한 단체였다. 이 무렵 국내 항일운동전선에도 사회주의가 유입되었다. 민족해방과 함께 계급해방을 부르짖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한 것이다. 김활란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통합을 추구하는 근우회(槿友會)의 창설을 주도하면서 구국에 앞장섰다.

 

1928년에는 덴마아크 여행을 다녀온 후 덴마아크의 방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농촌계몽을 하자는 내용의 「정말인(丁末人)의 농촌부흥론」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YMCA와 YWCA에서 농촌지도자를 양성하는데 힘썼다. 김활란은 당시 인구의 80%가 농민이었던 한국의 현실에서 농촌의 계몽과 부흥을 조국재건의 지름길로 인식했다. 그녀의 열정은 콜럼비아 사범대학 박사논문 「한국의 부흥을 위한 농촌 교육」 에 잘 드러나 있다. 농촌의 실태를 분석하고 교육을 통한 농촌부흥의 방법과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이 책은 매우 선구적인 교육이론으로 호평받았다.

 

 한국 최초의 여성박사이화여전 교장에 취임

 

1931년 한국 여성 최초로 외국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활란이 귀국하자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남자 박사도 흔하지 않던 시절에 여자가 박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남녀차별이 심하던 한국사회에 던진 파문이고 도전이었던 것이다. 다시 이화여전에 돌아온 김활란은 오직 한 가지 신념으로 교육과 사회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이화대학을 통하여 한국의 젊은 여성들에게 좀더 효과적인 교육을 시키자. 그들이 좀더 보람있게 조국에 봉사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자. 여성의 가사 활동도 직업의 개념을 가지고 이해되어야 한다. 여성도 적극적으로 자신의 지위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여성교육과 여성운동에 매진하였다.

 

한편 1930년대 후반 미ㆍ일관계가 악화되자 총독부는 외국인 선교사들을 모두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고 학교장을 한국인으로 교체하였다. 그리하여 1939년 아펜셀러 교장의 뒤를 어어 제7대 이화여전 교장으로 김활란이 취임한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이화를 이끌 무거운 책임을 지는 동시에 한국의 진정한 여성지도자로서 확고히 자리잡게 된 계기였다. 김활란은 미 선교부의 재정적 지원이 끊어진 상황에서도 기금을 모아 학교에 재단을 설립하고 독립된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애썼다. 그의 교육이념은 첫째 질보다 양의 교육을 실시하여 보다 많은 여성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었고, 둘째 자율적으로 결정ㆍ운영케 하는 자유주의 교육, 셋째 소외된 여성들을 위한 인간교육, 넷째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교육의 실시였다.

 

 여성 최초의 총장 해외 외교사절로 맹활약

 

해방의 감격 속에 이화여대는 대학 중에서 제일 먼저 종합대학 인가 신청서를 내어 1946년 이화여자대학교라는 명칭의 종합대학으로 승격하였다. 김활란은 두 개의 원칙 아래 학교발전계획을 밀고 갔다. 하나는 여자 대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다른 하나는 세계의 대학이 세계의 흐름에 발맞춰 새로운 전공분야를 개척해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화를 남녀공학으로 하자는 제안이 나올 때마다 그는 “국회의석의 절반을 여성이 차지하는 날이 올 때까지 안됩니다.” 라고 단호하게 말하곤 했다. 또한 미군정기(美軍政期)에는 여성교육담당 교육자문위원을 맡아 여성교육의 기틀 마련에 힘썼다.

 

1948년 남한만의 총선거가 실시되자 김활란은 제헌국회에 출마하였으나 아쉽게 낙선하였다. 이 때 여성 후보가 모두 19명 출마하여 한 사람도 당선되지 못하였는데 이러한 결과에 대해 김활란은 “지식계급의 여성과 일반여성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겠다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하며 여성들의 지지와 공감대 형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6ㆍ25 전쟁 때에는 부산으로 피난하여 천막교사를 세우고 졸업생을 배출시켰다. 한편 의과대학, 사범대학과 법정대학을 새로이 만드는 등 끊임없이 발전을 도모하였다.

 

해방 후 미군이 한국에 진주하면서 어느 날 미군이 이화를 방문하여 학교를 군용병원으로 쓰려하니 닷새 안에 비워 줄 것을 요청했다. 김활란은 당시 앞이 캄캄했으며, 너무나도 무력한 한국의 처지에 슬퍼하고 분노했다고 한다. 김활란이 단호히 거절했으나 미군측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때 마침 미국 뉴스위크의 특파원으로 한국에 와 있던 헤롤드 아이삭스씨의 도움으로 미군 장군을 만난 김활란은 “일제 때도 내놓지 않았던 학교입니다. 지금 해방에 차있는 한국에서 한국의 고등교육기관을 내놓으라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십시오. 미국의 어떤 여자대학을 군에서 밀고 들어갔다면 어떤 여론이 일어날지 생각해보셨습니까?” 라고 차분히 항의했다. 장군은 강제로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상이 군인들을 위해 건물의 사용을 요청하는 것이니 동의해달라고 부탁했고, 학교를 위해서 더 좋은 장소를 물색해드리겠다는 약속까지 하며 감활란을 설득했다. 그러나 김활란은 “이 학교는 나의 사유재산이 아닙니다. 수많은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전국 여성의 여론을 들은 후에라야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라고 단호히 거절했고, 선생의 논리적인 말에 말문이 막힌 장군은 결국 이화의 건물 사용을 허가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공보처장직을 맡은 그녀는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하여 민간외교기구인 ‘전시 국민 홍보 외교 동맹’을 조직하였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을 방문하여 유엔군 파견에 대한 한국민의 감사의 뜻을 전하였다. 한편으로는 영자신문 「코리아 타임스」를 창간하여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리는 등 민간외교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막사이사이상 수상

 

또한 이 시기에 여성들이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YMCA를 비롯하여 독립촉성애국부인회(1945년), 대한민국여학사협회(1950년), 대한여성단체협의회(1959년) 등을 조직, 보다 효과적인 단체활동을 펴나간 것이다. 1961년 정년 퇴직해서도 이화대학교의 이사장으로 한국여성교육의 발전과 한국의 복음화운동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녀는 초교파적으로 믿음의 동지를 규합하여 금란전도협회(1961년)를 조직하고 본격적으로 농촌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대한 기독교 교육자협회 회장, 전국 복음화운동 명예회장, 한국기독화운동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한국복음운동에 힘썼다.

 

한국의 여성교육과 국가, 사회, 국제교류, 종교문제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김활란은 그 공로로 ‘대한민국상’ (1963년 8월), 아시아의 ‘막사이사이상’ (1963년 8월),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다락방 상’ (1963년 10월)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그가 1970년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후에는 ‘대한민국 일등 수교훈장’이 추서되었다.

 

최경연기자(womenisnews@hanmail.net)

2006-04-28, HIT : 2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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