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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6]여성의 역사는 남긴 사람들-최은희(1902-1984)

여기자의 사회적 위상을 뚜렷하게 자리매김시켜...
광복후. '여학교 교장은 여자로' 운동 전개



♠ 개화 가문의 막내 딸, 여학생으로 3ㆍ1운동 참가

최은희(崔恩喜)는 1902년(호적에는 1904년) 음력 11월 21일 황해도 연백 백천의 개화 교육자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최병규는 대한제국 말 서울에서 낙향하여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 분배하고 노비 해방, 계급 타파에 앞장 서고 학교도 3개나 세운 개화파 우국지사였다. 10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난 최은희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비탄과 개혁을 위한 기개를 보며 자랐고 학교에서는 배일독립사상을 키웠다.


해주 의정여학교를 졸업한 최은희는 서울에 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 3학년 때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사람인 박희도의 지도로 3백여 명 전교생의 선두에서 만세 시위에 참가, 구류 처분을 받았다. 24일 만에 풀려난 그는 고향에 돌아가 다시 만세 시위를 주동, 이번에는 6개월 징역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고 얼마 후 특사로 복권되었다. 그후 일본 유학 시절에도 그는 내내 요시찰인, 불령선인으로 감시, 조사받기 일쑤였다. 그 때 황신덕, 박순천, 이현경 등과 친하게 지냈고 이들은 귀국 후에도 활동을 함께 한 친구들이었다.

 

♠ 유능한 멋쟁이 여기자로 맹활약
1920년 3월 5일 창간된 조선일보는 1924년 9월에 사장 이상재, 부사장 신석우가 취임하며 일대 혁신을 기도하고 있었다. 주필 안재홍, 편집국장 민태원, 논설위원 신일용을 비롯해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이상협이 사장 송진우와 마찰함으로써 기자 10여 명과 함께 조선일보로 전직하였다. 당시 회사 혁신의 일환으로 부인기자를 등용하고자 할 때 마침 최은희가 발탁되었다. 당시 일본여자대학 사회사업학부 아동보전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그의 전격적인 발탁에는 춘원 이광수의 힘이 컸다.


최은희는 최초의 여기자는 아니었으나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 여기자였다. 동시에 그는 여기자 중 한 신문사에서 가장 오랜 기간인 8년 간 재직하며 정치부, 사회부, 학예부를 두루 거쳐 학예부장까지 한 후 퇴사하여 여기자의 사회적 위상을 뚜렷하게 자리매김 하였다.


기자로 일하는 동안 그는 처음으로 부인견학단을 조직, 인솔하여 부인들의 사회화에 힘쓰는가 하면, 기생으로 변장해 인력거를 타고 사회 어둔 곳을 탐방 취재하는 등 열심히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쳐 생생한 기사를 씀으로써 여기자의 활동 영역을 넓히고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1924년 11월 23일부터 신문에 가정란을 신설해 '첫 길에 앞장선 이들' 을 26회에 걸쳐 연재하는 등, 지면을 통해 부인 상식, 여성의 사회적 위치, 여권신장 등 대여성 지상 계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당시 그가 처음 받은 봉급은 본봉 50원에 거마비, 기밀비 15원을 더하여 65원이었다. 쌀 한 가마에 5원이 채 안될 때, 특별상여금 지방 출장비까지 더하면 120원을 받은 적도 있어 비교적 높은 월급의 전문직이었다. 덕분에 그는 보통 여자구두 한 켤레에 5~6원 할 때 17원짜리 악어가죽 구두에 그것도 모자라 5원어치 보석을 박아 신기도 하였고, 흰저고리 검정 치마 대신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화려한 색깔의 옷도 마다않은 장안의 멋쟁이였다. 그밖에도 남자 기자들에 앞서 비행기를 타고 취재한 최초의 기자였고, 방송에 첫 사회자로 나가 그 용기와 능력을 과시함으로써 여기자로서의 명성을 더욱 드높였다.

 

♠ 결혼 후 모범적인 가정생활 누려
최은희는 1930년 7월 일본대학 법과 졸업 후 법원에서 일하던 7년 연상의 이석영과 결혼하였다. 중매 혼인한 광주 이씨 남편은 한음 이덕형의 후예로 미남에 호방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최은희가 1932년 늑막염을 앓아 신문사를 그만 두고 해방될 때까지 14년간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을 때 남편의 보호 덕분에 가정을 잘 지킬 수 있었다. 때문에 최은희는 창씨개명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당시 유명인사들이 저지르기 쉬운 친일 활동도 피할 수 있었다. 단지 그도 총독부 산하 국민저축조합의 모범조합장으로 표창을 받기도 하고 서대문지구 방공훈련 때 총지휘한 사실에 대해 일제에 협력한 것으로 이후 자서전 「여성전진 70년」에서 고백하였다.


남편이 1942년 병사하자 최은희는 홀로 자녀들을 훌륭히 키우는 데 주력하였다. 그는 바느질도 하고 우표 등을 파는 작은 가게도 차려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광복 후에는 대학에 나가 강의도 하면서 1남 2녀의 자녀들을 모두 박사로 키워냈다. 그것은 그가 어린 자녀들에게 특별히 자립, 협동, 화목을 가훈으로 가르쳤고 커서는 의로움을, 그리고 부귀 명예보다는 언제나 자기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지식뿐이라고 공부하기에 힘 쓸 것을 강조한 결과였다. 어머니의 준비성, 검약함, 끊임없는 공부 등을 지켜본 자녀들은 미국 유학까지 자력으로 할 수 있는 모범을 어머니에게서 찾았다. 사위 2명까지도 박사학위를 받고 자신도 중앙대 명예문학박사가 됨으로써 그의 집안은 모두 6명의 박사 가족을 이루었다. 그같은 훌륭한 자녀 교육으로 그는 '장한 어머니상'도 수상하였다.

 

♠ 광복 후 활발한 사회활동 재개
광복이 되자 최은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회활동을 재개하였다. 1945년 9월 10일 여권운동자클럽을 만들어 '여학교 교장은 여자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에 따라 경기여고에 고황경, 무학여고 차사백, 여자사범 손정규 교장 임명에 성공하였다. 그 자신은 1946년 5월 서울시 외곽단체인 서울보건부인회 부회장이 되어 서울 시민의 위생보건생활 향상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승만 박사의 요청으로 1948년 자유당 산하 단체 대한부인회로 통합, 서울시 본부 부회장 겸 문화부장으로 8년간 일하였다. 이때 한소제, 박마리아, 박순천, 정현숙, 안인서 등이 함께 활동하였다.


1952년 12월에는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 당수 임영신과 함께 당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때 최은희는 기자 경력을 발휘해 당의 각종 성명서나 문서 작성을 전담하였다. 그밖에 방계단체인 국방부녀회 창설위원 및 문화부장, 여성단체총협의회 문화부장, 여자국민당 문화부장 및 감찰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1961년 5ㆍ16 후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 조국수호국민협의회 여성대표, 영신아카데미 창설위원 등 여러 사회단체의 여성 대표로 적극 참여했다.


최은희는 또한 최초 여기자 이름에 걸맞은 많은 여성 관련 저작물을 낸다. 그중에는 세권의 방대한 책 「조국을 찾기까지」를 비롯해 초기 작품으로 「씨뿌리는 여인」(1957), 「근역의 방향」(1961) 등이 있고, 자서전에 해당하는 「여성전진 70년」과 「한국개화여성열전」 등이 모여 1991년 최은희 여사 유고 전집 5권이 조선일보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전집은 1984년 그가 작고한 후 이미 나온 책과 새로 발굴된 유고를 모은 것으로 갑신정변 때 유일하게 행동대원으로 참여한 창덕궁 무수리 고대수(顧大嫂)로부터 백선행, 최송설당, 김울산 등 개화기 선각여성들의 여성운동과 민족운동, 여성단체 활동 등이 자료 고증을 통해 실증적으로 서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까지 한국사회사를 기록한 연구서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그는 책을 통해 그가 못다한 기자로서의 꿈을 실현시켰음은 물론 여성운동과 여성사 연구에 기여한 것은 그 무엇보다 높이 평가받을 일이다.

 

♠ '최은희 여기자상'으로 다시 태어나
최은희의 나라 사랑은 남달랐다. 1982년 정부가 독립기념관 설립을 계획하고 언론에서 범국민모금운동을 호소했을 때 그는 제일 먼저 조선일보사에 1백만원 성금을 내놓았다. 또한 그는 1983년 5월6일 적십자병원에 입원 투병하는 가운데 5천만원을 조선일보사에 기탁,
 "한평생 언론 창달을 염원하고 기여하고자 한 꿈과 뜻이 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충정"
을 표했다.


조선일보사는 이에 따라 1984년부터 해마다 우수 여기자에게 '최은희 여기자상'을 수여하고 있다. 그의 평생을 통해 조그맣고 허술한 행촌동 고가의 조각보 커튼이 상징하듯 그는 가난을 이기며 자신의 가족과 사회에 기여하고도 알뜰히 모은 재산을 몽땅 사회에 환원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당당히 살면서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들을 성실히 일렀고 생의 마지막까지 여성 사회에 커다란 귀감을 보였다. 최은희는 1984년 80세로 별세, 용인공원묘지에 묻혔다. 그의 묘비에는 1984년 8월17일자 동아일보 컬럼 '횡설수설'과 8월18일자 조선일보 컬럼 '만물상' 을 새겨 그의 업적을 기렸다.

 

최경연기자(womenisnews@hanmail.net)

2006-04-17, HIT :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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