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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4] 여성의 역사를 남긴 사람들 - 이월화1904-1933


한국 영화의 위대한 첫걸음에는 무성영화 ‘아리랑’이 있고, 그 영화를 만드는데 공헌한 춘사 나운규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군에는 춘사흉상이 있고, 성북구에는 춘사거리가 있고, 영화계에는 춘사영화상이 있다. 춘사보다 2년 늦게 태어나 4년 일찍 삶을 마감한 배우. 고통스러운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 연극에 눈을 뜨고 영화배우로서 활동한 배우. 이월화(李月華)는 치열하게 연기에의 꿈을 불태웠고 대중의 인기를 얻었지만 그가 한국 영화사에서의 당당한 선구자의 역할과 존재마저 부정 당하는 것은 아마도 여배우라서가 아니겠는가.

 

♠ 식민지 시대에 과감히 나의 길을 꿈 꾼 소녀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어떤 감독이 수상소감 끝에 ‘겨우 여배우들 상이나 타게 해주는 감독이라는 딱지를 이제야 떼는 것같다’고 말했다. 바꾸어 말하면 여배우들만 상을 탈 때 감독으로서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여배우들은 혼신을 다한 연기력으로 승부하고 감독은 작품의 완성도로 승부한다는 상식을 감독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은 여배우는 ‘연기력이건 예술성이건 무시하고 얼굴과 몸이 상품이다’는 영화계의 시각을 환히 드러낸다. 그러니 한국 영화 초창기에 여배우를 대하는 사람들의 시각은 더 말해 무엇하랴. 잘못은 덮고 공적만 나열해야 할 죽음을 알리는 신문들조차 예의(禮儀)를 잃고 호기심으로 일관했다. 고인(故人)이 된 그를 ‘본명도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고아’ 또는 요부(妖婦), 독부(毒婦)라고 소개한 것이다. 하지만 이월화는 일본치하에서 보통의 여자들은 꿈도 못 꾸는 꿈을 향해 ‘나의 길’을 걸은 한국 최초의 영광스러운 여배우였다.


1919년, 한국에서 처음 만든 영화는 필름을 연극 사이에 끼어 상영한 연쇄극 ‘의리적 구토(義理的 嘔吐)’이다. 여기에서는 여성의 사회활동이 금지된 당시의 관습에 따라 남자가 여자 역할을 했다. 예쁘장한 미남배우 김영덕이 여장(女裝)으로 출연한 것이다. ‘지기(知己)’라는 영화에서도 이응수가 여배우의 역으로 출연했다. 여배우가 여자역으로 출연한 본격적인 영화는 1923년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월하의 맹세’이다. 건달들과 어울리며 주색잡기(酒色雜技)에 빠진 영득을 정순이 헌신적으로 도와 재기(再起) 시킨다는 내용이다. 정순의 부탁으로 정순의 아버지가 저축한 돈을 찾아 영득의 빚을 갚아준다는 점에서 저축을 장려하는 계몽영화라 할 수 있다. 조선총독부에서 사회의 저명인사 백여 명을 초청해서 경성호텔에서 시사회(1924년 4월)를 열고, 그 뒤로는 극장이 아닌 전국의 공공시설에서 상영되었다. 여주인공 정순 역할을 맡아 여장배우 아닌 여자로서 최초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 배우가 바로 이월화이다.

 

♠ 카츄샤와 카르멘 역으로 인기 얻어


이월화는 충청도에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여의고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 서울로 올라와 진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를 다니면서 틈틈이 조선극장과 단성사와 우미관을 드나들었다. 그는 연극이나 영화를 본 날은 집에 와서 거울을 마주하고 주인공의 연기를 흉내내었다. 거울을 상대로 울고 웃으면서 그는 연기력을 키워갔다. 무대에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열망은 그를 사로잡았다. 이월화가 너무 자주 찾아오자 우미관의 변사(辯士)가 얼굴을 알고는 물었다.

 

“나이 어린 처녀가 뭣하러
극장엔 매일 나오는 거야?”
“여자는 왜 변사가 될 수 없나요?
나도 변사 한 번 해봤으면…”

 

여자가 사회에서 활동하면 ‘내놓은 여자’ 취급을 받는 눈총에 상관없이 그는 무엇이든 마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일념으로 ‘나의 길’을 닦아 나간 듯하다.


18 세의 어느날, 마침내 운명의 기회가 왔다. 연극인 김도산과 박승희를 통해 당시 신파극이 휩쓸던 연극에 입문한 것이다. 그는 여명극단의’운명’에서 메리역으로 인정 받고는 윤백남을 만나 민중극단 창립에 참여했다. 민중극단의 ‘영겁의 처’에서 올가역으로 천재적 연기라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정숙이란 예명(藝名)으로 토월회의 두 번째 작품 ‘부활’에서 여주인공역을 맡았다. 가련하면서도 굳센 카츄샤, 귀공자를 사랑한 죄로 창녀가 되었으나 다시 그를 만나 종교적인 사랑으로 부활한 카츄샤를 뛰어나게 소화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카르멘’에서는 병사 돈 호세를 사랑하는 집시 여인역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카츄샤나 카르멘 역할은 창녀나 집시로 요부 이미지를 못 박아 연기자로서의 이월화를 가리는 먹구름 역할을 한 점도 있다.

 

♠ 한국 최초의 영화 스타 탄생


그의 연기력과 외모를 눈 여겨 본 윤백남은 연극에서의 인기를 영화로 옮길 구상을 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제안, 남장배우가 아닌 여자 연기자에게 여주인공을 맡겨서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영화가 1923년, 윤백남 각색, 감독의 영화 ‘월하의 맹세’인 것이다. 영화에서 그는 연극에서 사용하던 이정숙이란 예명을 버리고 원래 부르던 이월화라는 이름을 쓴다. 자신의 신분노출을 꺼리는 당시의 관습에도 불구하고 본명을 사용한 것은 그가 남다르게 솔직하고 자신감이 넘쳤음을 알 수 있다.


‘월하의 맹세’에서 그는 연극에서 덧씌워진 요부의 모습을 벗어던졌다. 웃는 모습과 우는 모습, 사뿐히 걷는 모습 등을 통해 감정의 폭을 조절하여, 헌신적이면서도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주었다. 여기에서의 성공은 이월화에게 조선 키네마 최초의 영화 1924년 ‘해(海)의 비곡(悲曲)’에 다시 주연으로 캐스팅되는 행운을 주었다. 여배우가 등장할 수 없었던 인습을 깨고 최초로 등장하기까지의 상황, 연극배우로 연기력을 인정 받아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영화배우로 성공한 것은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그는 소박한 미모에 아담한 몸매와 ‘말괄량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활달한 성품이 배우로서 적격이었다. 남아 있는 여러 장의 사진에서는 유난히 맑게 빛나는 눈동자와 통통하면서도 귀염성 있는 얼굴, 당찬 표정에 씩씩한 기질이 드러난다. 이런 그에게 맡겨진 역은 대부분 요부형 여성이었다. 현모양처, 상록수의 채명신 같은 역할을 충분히 소화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초창기에 여배우를 쓰는 일조차 획기적이었으니, 여성을 극의 중심에 놓는 영화도 드물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자연 남자를 유혹하는 타락한 여성이나 남자들의 싸움에 희생되는 청순가련형이 등장하는 영화가 대부분이었다. 이런 풍토에서는 위대한 연기자, 연기력으로 영화의 성패를 가늠하는 예술정신 따위는 기대하는 것조차 무리였을 것이다.

 

♠ 감독에 분노하고 영화계에 환멸하는 스타
윤백남은 그의 다음 영화인 ‘운영전(雲英傳)’에서도 그에게 여주인공인 안평대군이 사랑한 운영 역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 아무 해명도 없이 주연을 김우연으로 바꾸었다. 김우연의 미모가 이월화보다 뛰어나서라느니, 김우연과 윤백남의 교분이 두텁다느니, 등등의 소문이 나돌았다. 그러나 실제로 김우연은 스크린 테스트 결과 이월화보다 뛰어난 조건이 아니었다. 배우는 연기가 첫째 조건인데 사전에 해명도 없이 주연을 교체한 점에 이월화는 분노했다. 그는 윤백남과 크게 싸우고서 윤백남의 제작사가 있던 부산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다. 감독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배역을 얻는 영화계 현실에 불만을 품고 독자적으로 배우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이월화는 진명학교를 거쳐 이화학당을 다닌 당대 신여성이다. 남성과 비교해도 남 부럽지 않은 신교육을 누린 엘리트인 것이다. 그러므로 미모가 나은 여배우에게 밀려 영화계를 떠났다는 설(說)은 과장일 수 있다. ‘운영전’ 사건 이후에도 1927년에 ‘뿔 빠진 황소‘와 1928년에 ‘지나가(支那街)의 비밀(秘密)’에서 여전히 연기자의 길에 집착을 보인 것과 모순되는 것이다. 비록 새로운 여배우들의 도전이 있더라도 그는 최초의 여스타로서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특히 어려서 부모를 잃고 남의 손에서 자란 이월화가 이화학당에 들어간 것이나, 당시 남자들의 세상이었던 연극무대를 거쳐 영화에서 주연배우가 되었다는 점을 보아도 그렇다. 그는 대단한 자아 정체성 의식과 강인한 정신력을 가진 여성이었으며 자신의 삶을 방관하지 않고 양지를 향해 적극적으로 개척하는 의지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영화를 떠난 것은 여배우를 연기자로 성장시키지 않고 단순한 노리갯감으로 대우하는 남성 중심의 영화계에 대한 통절한 환멸이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이월화가 활동한 20년대로부터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현장에서 ‘여배우가 감독에게 대들거나 노골적으로 불만을 노출시키는 일은 드물다. 여배우로서의 생명을 끝내려는 각오 없이는 감히 생각도 못할만큼 큰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운영전’의 캐스팅을 계기로 이월화가 당대 한국영화의 현실에 낙심하고 분노를 표명한 것은 대단히 용감한 일이었다. 그 후에도 이월화는 김우연, 김남연, 김정숙 등 연기력보다 미모와 감독과의 교분으로 주연을 맡는 풍토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려서부터 천직처럼 알고 열정을 불태우던 배우라는 직업에 회의하고 끝내 포기한 채 외지로 떠돌이 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여배우를 길들이는 방식을 거부한 여배우 이월화의 비참한 삶의 말로는 한 개인의 비극이라기 보다 한국 영화의 한 비극적 단면을 보여준다.

 

♠ 여성영화인으로서의 평가, 아쉬워


젊음을 다 바쳐 몰두했던 영화를 떠난 젊은 여배우가 어떤 새 삶을 찾을 수 있을까. 돈이 없으니 영화제작자도 될 수 없고, 영화감독도 될 수 없고, 연기 지도자도 사회가 원하지 않는다. 이월화는 어머니와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 댄서도 하고 한 때 기생도 하다가 상하이로 건너가 일본계 중국남자와 연애를 했다. 1933년,병 든 어머니를 간호하려고 한국에 잠시 들렸다가 다시 상하이로 가려고 일본 모지(門司)에서 배를 기다리던 중 심장마비로 객사했다. 이밖에도 그녀의 죽음과 연애담을 둘러싼 다른 이야기들이 떠돈다. 연극시절에 만난 유부남 박승희와의 사랑과 김우연에게 주연을 빼앗긴 후 울분에 찬 생활을 하다가 자살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의 삶과 죽음을 둘러싼 이런 설들은 주로 동료 영화인들의 인터뷰나 증언에 따른 것인데, 그것들이 서로 다르다. 특히 그의 죽음에 대한 부분은 증언과 신문기사의 내용이 매우 다르다. 신문을 과신하는 사람들은 증언으로 재구성된 이월화의 삶과 죽음에 관한 기록들을 불신한다. 진실을 아는 사람은 영화(映畵)로서 영화(榮華)를 누렸지만 또한 영화로서 영화를 빼앗기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이승을 떠난 이월화 한 사람일 것이다. 여성영화인을 공적인 영역에서 평가하지 않고 사적인 운명의 비극 속으로 가두는 것은, 남성역사의 주변에서 지워진 여성의 문제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이다.


영화는 현대인의 삶을 복사한다. 현대인의 꿈을 복사하고 실현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숱한 젊은이들이 영화예술인의 꿈을 키우며 영화가를 배회한다. 그러나 여배우가 맡는 역할은 한정되어 있다. 여배우는 여전히 두목의 여자, 반란의 씨를 잉태하는 여자, 삼각관계에 말려든 여자, 희생하고 봉사하는 여자,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남성에게 영감(靈感)을 주는 역할에 머문다. 여자가 사랑과 섹스만을 추구하는 듯한 영화 속의 장면들은 아름다운 여자와 죄의식 없이 놀고픈 남자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성인전용영화관’에서 그런 배설의 쾌감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상처받은 어린 시절, 화려한 스타로서의 삶, 이국에서의 방황을 모두 겪은 이월화의 삶은 짧지만 영화처럼 극적이다. 엉터리로 각색된 이월화의 삶의 안개를 조금씩 거두어 나가다 보면 이월화야말로 온몸으로 남성중심 세상의 바람을 탔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바람에 맞닥뜨리며 자신의 삶을 소진(消盡)시킨 선각자적인 현대 여성이란 점을 발견하게 된다. 지금도 많은 제 삼, 제 사의 이월화가 영화가를 떠돌고 있으리라. 그들이 이월화의 삶을 복사하지 않고 보다 당당한 영화인의 영화를 누리기를 이월화는 저승에서도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자료정리

최경연리포터(womenisnews@hanmail.net)

2006-03-13, HIT :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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