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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여성의 역사를 남긴 사람들

빼어난 용모와 탁월한 기량 지녀
 


‘잘하면 살 판이요...
 못하면 죽을 판이라’


 신명나는 놀이판 속에 핀 열정의 꽃이여


흥겨운 날라리와 장고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색색의 옷을 차려 입은 신명나는 놀이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살판쇠는 슬쩍 어깨를 추스리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여남은 번이나 법사를 넘는다.
다시 옆시금, 앞시금, 돌아때기, 노구걸이 등 현란한 땅재주의 체기(體技)가 이어지자 구경꾼들의 박수가 터져 나온다.


살판쇠가 다다른 곳에는 든든한 통나무 3개를 엮어 만든 세발장대가 양쪽으로 세워져 있고 두 길 정도 훌쩍 높이 굵은 동아줄이 매어져 있다. 바야흐로 ‘어름’이라 불리는 줄타기가 막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오늘날의 사회자 격인 매호씨가 좌중 한가운데로 나서더니 잽이[樂士]의 장단에 맞춰 걸쭉한 입담으로 좌중을 사로잡는다.


“공자, 맹자, 유자, 탱자, 죽자, 살자 말씀이 집안 망칠 반풍수로 쇠꼬리가 되지 말고 닭부리가 되라고 하셨것다.”


“나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삼신할미한테 점지 받아 어미 뱃속에서 나와 세상 구경하면서부터 아비한테 종아리 맞아 가며 줄타기를 익혔것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높은 장대 끝에서 밧줄에 한 발을 올려놓고 있는 어름산이는 익살스런 매호씨의 말을 받아 청산유수처럼 한바탕 재담(才談)을 쏟아 놓는다.
열 예닐곱이나 되었을까? 바야흐로 막 소녀 티를 벗으려는 그녀는 비록 자그마한 체구에 남복(男服)을 했지만 빼어난 용모를 감춤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시원한 이마, 오똑한 코, 발그레한 두 뺨에 앵두 빛 입술까지. 구경꾼들은 우선 그녀의 미모에 숨이 턱 막혔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밑을 내려본다면 어지러울 높이건만 그녀는 서슴없이 동아줄 위로 왼발을 내디딘다. 이어 오른발을 내밀고, 다시 발이 두어 차례 교차되는가 싶자 어느 틈엔가 밧줄 중간까지 와 있었다.


“잘한다!”
구경꾼들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출렁이는 밧줄 위에서 양손을 가벼이 움직여 교묘하게 중심을 잡고 있는 어름산이는 그야말로 선녀가 하강한 듯 눈이 부셨다.
갑자기 어름산이의 몸이 낮아지는가 했더니 양발로 밧줄을 밀어낸 탄력으로 그녀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어린 아이 키만큼이나 높이 뛰어올랐던 어름산이는 밑으로 떨어지며 양다리를 가위처럼 벌려 동아줄을 사이에 끼워 몸을 추스리더니 다시금 줄 위에 바로 섰다.


“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고, 어름산이는 더욱 신명이 나는지 돗붙이기, 발붙이기, 외홍잡이, 쌍홍잡이, 양홍잡이, 칠보단장, 촛칠보, 외칠보, 배돛대, 황새령넘기, 쇠두렁넘기, 접대서기, 추천 등 갖은 재주를 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정도 넓이도 못 되는 줄 위에서 선보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묘기에 이제 구경꾼들은 박수치는 것조차 잊은 채 넋을 잃고 있었다.
갖은 재주를 보인 어름산이는 숨을 한 번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따뜻한 봄철은 돌아오고 마음은 생금생금하고 잔디 잔닢 나고 아지랑이는 끼고 마음이 싱숭생숭하니, 우리 여기서 놀아볼 거렷다.”
“얼씨구!”


매호씨의 추임새에 어름산이는 신명이 난 듯 구성진 목소리로 오봉산타령을 뽑아냈다.

 

오봉산 꼭대기 매화와 돌배나무는
가지가지 꺾어서 영산홍이구나.
에헤이요 데헤이야 연산홍록에 봄바람
가는 님 허리를 에루화 더덤썩 안고서
가지를 말라고 에루화 통사정을 하구나
에헤이요 데헤이야 연산홍록에 봄바람

 

맑고 고운 목소리에 실린 애달픈 곡조는 듣는 이로 하여금 절로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만들었고, 흥겨운 가락은 사람들을 들뜨게 만들었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눈물 흘리던 구경꾼들은 잠시 동안 다른 세상에 다녀온 듯한 착각을 가지도록 했다.


초라니가 나타나자 비로소 정신이 든 구경꾼들은 손바닥이 터져라 하고 박수를 멈추지 않았고, 앞을 다투어 엽전푼을 광주리에 던졌다. 광주리는 금새 동전으로 가득 차, 초라니는 새 광주리를 가져와야만 했다.


이렇듯 놀라운 기예와 빼어난 노래 솜씨로 좌중을 사로잡은 어름산이는 과연 누구인가?
그는 안성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남사당의 예인으로 대원군까지 사로잡아 전설이 된 바우덕이였다.


소설 『장길산』의 무대인 ‘청룡사’를 거점으로 안성 서운산(瑞雲山) 청룡사(靑龍寺)는 불교사적으로보다는 민속적으로 중요한 비승비속의 절이다. 남사당패들은 한겨울을 청룡사에서 나고 봄부터 가을까지는 절에서 준 신표를 가지고 안성장터를 비롯하여 전국을 떠돌면서 연희를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張吉山)의 무대인 광대들의 본거지가 바로 이곳 청룡사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사찰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절에서 신표를 주어 걸립을 내보내는 일이 잦아지고 아예 절에서 굿패를 꾸려서 시주를 나가기도 했다.

 

안성의 남사당패는 청룡사 신표를 받아 전국을 돌면서 연행을 팔았으니, 조선 후기에 청룡사는 온갖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가장 빨리 들을 수 있던 곳이기도 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내일은 저기에서 동가숙 서가숙하며 떠돌던 남사당패가 왕래하는 곳인 만큼 정보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는 다른 지방의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기예를 팔던 남사당패는 겨울이 되면 청룡사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며 아이도 기르고, 연희도 갈고 닦으면서 봄이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들은 밥을 먹여 주고 잠을 재워 주면 별다른 보수 없이도 밤새워 놀곤 했다는데, 경기도 안성·진위, 충청남도의 당진·회덕, 전라남도 강진·구례, 경상남도 진양·남해, 황해도 송화·은율 등지에 본거지가 있었으며,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바로 안성 서운산 불당골의 팔사당마을(남사당집이 8채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을 근거지로 삼았던 안성 남사당패였다.

 


대원군이 옥관자를 하사하다.


고종 2년인 1895년, 대원군은 기울어 가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을 중건하기로 결심하고 영건도감을 설치한다. 경복궁 공사가 진척되자 각지에서 운집한 부역민의 사기를 고무시키기 위해서 무용대, 농악대, 남사당패 등을 불러 놀이판을 벌이도록 했다. 내노라 하는 실력을 자랑하는 이들이 모여 작업 중간의 휴식시간에 재담과 익살, 풍악으로 부역민들의 피로를 덜어 주고자 한 것이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이 성공적으로 빨리 진척되도록 부역민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 이러한 놀이패들을 환영하고 적극적으로 그들의 활동을 권장했다.


이들 가운데 빼어난 기량을 지닌 패거리는 운현궁으로 불려가 대원군 앞에서 각종 재주를 보이기도 했는데, 특히 눈에 띈 인물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안성 남사당패의 꽃 바우덕이였다.
본래 남사당은 남자로만 이루어진 집단이나 안성패에는 드물게도 ‘바우덕이’라는 여자가 있었고, 그녀는 이미 어릴 적부터 뛰어난 기량을 보여 전국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져 있던 터였다. 그래서 대원군은 일부러 안성 남사당패를 불러 놀이판을 벌이게 했고 바우덕이의 노는 모습을 보고 명불허전이라 하며 그녀의 재능에 감탄했다 한다.


그런데 당시 안성 남사당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그들의 놀이보다는 바우덕이의 소고와 춤 그리고 줄타기에 넋을 잃었고 대원군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공사를 하러 온 인부들은 바우덕이의 모습을 보기 위해 등짐을 벗어 던지고 빈 지게만 지고 뛰어다녔다는 말도 있고, 바우덕이에 대한 노래까지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녀가 당시 얼마나 유명했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기예를 본 대신들의 반발은 의외로 드세었다. 내심으로는 감탄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했겠으나, 때로는 웃음과 몸을 팔기도 하는 사당패들에 대해 엄격한 유교관을 지닌 선비들은 결코 좋은 인식을 가지지 않은 때문이었다. 여기저기서 선비들이 대원군에게 말하기를,
“대감, 바우덕이라는 계집은 요녀(妖女)이옵니다. 뛰어난 미색으로 뭇사내의 넋을 빼앗고, 교태로운 음성으로 간장을 빼놓으니 마땅히 멀리해야 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그렇사옵이다. 어찌 천한 계집으로 하여금 사직을 바로 세우는 신성한 역사를 그르치려 하시나이까? 부역민들이 도통 일손이 잡히지 않는 모양이니 마땅히 참수해야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나는 전혀 넋을 빼앗기지 않았고, 부역민들 또한 신명이 나서 일을 잘하는데, 그게 웬 허언이오. 오히려 그대들이 넋을 빼앗긴 듯하구려? 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대원군은 과연 일세를 풍미할 만한 대인의 풍모를 지닌 인물이었다. 근엄한 유학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하는 대신들을 한 마디로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들고, 오히려 한술 더 떠서 바우덕이를 불러 뛰어난 예술성을 칭찬하고 옥관자(玉貫子)를 하사하기까지 했다.


그뒤로 바우덕이의 안성 남사당패는 옥관자를 남사당기의 상부에 붙이고 하단에는 다섯 방위를 상징하는 청홍황흑백(靑紅黃黑白)의 오색 삼각기를 달았다. 먼 곳에서도 쉽게 구분되는 안성 돌우물농악대의 두레기가 나타나면 어느 마을의 두레기이든지 기수를 숙여 기배(旗拜)를 하였다고 한다.
이런 대중적인 사랑에 힘을 얻은 까닭인지 1910년경 안성 남사당패는 꼭두쇠 자리에 여자인 바우덕이를 앉히는 대혁신을 한다. 그 후 그녀는 10여 년간 안성 남사당패를 이끌며 돌아다니며 기예를 펼치다 결국 병을 얻어 죽은 뒤 가마니로 둘둘 말린 채 눈 속에 파묻혔다.
스물 한 살 꽃다운 나이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남편 이모(李某)는 미친 듯이 남사당에만 몰두했다고 한다.


바우덕이로 명성을 드높인 남사당은 김복만, 원육덕, 이원보, 김기복으로 그 계보를 이어갔다. 이후 1960년 ‘민속극회 남사당’ 이 옛 연희자들이 재규합했고, 1982년에는 ‘안성남사당 풍물놀이보존회’가 세워져 1989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다.


그제야 안성 문화인들 사이에선 안성 남사당패를 주도했던 바우덕이의 넋을 기려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자, 그때까지 돌보는 이 하나 없이 잡초 속에 황량하게 버려져 있던 그녀의 무덤을 새롭게 단장해 한 많았던 ‘전설의 가인’ 바우덕이의 넋을 위로했다. 바우덕이가 대원군으로부터 옥관자를 하사받은 지 124년만의 일이었다.


불꽃 같은 삶을 살았기에, 양반이 아닌 홀대받는 천민이었기에, 하지만 누구보다도 뛰어난 기예를 지녔기에 바우덕이는 이처럼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에 남았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안성 등지에는 바우덕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줄 위에 오르니 돈 쏟아진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바람을 날리며 떠나를 가네.

 

바우덕이의 본이름은 ‘박우덕’이라고도 하고, 성은 김씨이고 이름은 암덕(岩德)이었기에 이를 우리말로 풀어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자료정리/최경연리포터

최경연리포터(womenisnews@hanmail.net)

2006-02-28, HIT : 1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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