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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2] 여성의 역사를 남긴 사람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물 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관이 향기로운 너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현재까지도 널리 애송되고 있는 노천명(盧天命)의 ‘사슴’이라는 시이다. 시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몇 번은 들었을 시 ‘사슴’을 쓴 노천명은 매우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시와 산문을 남긴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이다.


노천명은 1935년 「시원」 창간호에 시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이래 20여년간 시 172편과 다수의 산문, 소설을 남겼다. 한국에 여류문학이 등장한 것은 1920년대이지만 1930년대 노천명에 의하여 당대 여류시인 중 가장 전문적이고 본격적인 시가 등장하였다.


여성 특유의 날카로운 감각과 섬세한 표현으로 한국 현대시의 폭과 깊이를 더해 주었다는 측면에서 노천명은 한국 현대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그의 시들은 고독과 향토적인 정서를 근간으로 하여 여성다운 섬세한 서정을 절제되고 돋보이는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노천명은 1912년 9월 황해도 장연에서 사남매중 셋째로 태어났다. 장연에서의 어린 시절은 매우 행복했다. 지주이면서 무역에도 성공한 인물이었던 아버지는 천명이 병으로 앓아 누웠을 때 노루 사냥을 하여 피를 먹이는 자상함을 보여 주었고, 어머니는 ‘옥루몽’을 읽어 주는 등 천명이 문학적 감수성을 갖게 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장연은 황해도 연안 지방으로서 바다를 건너면 바로 중국의 산동성에 닿는 곳이었다.

 

중국 대륙을 거친 문물이 우리나라 내륙지방으로 파급되는 요지로서, 일찍이 천주교가 유포되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절이라 일컬어지는 학림사의 절터가 있는 곳이자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소래 예배당이 있는 곳으로 일찍 개화된 곳이었다. 고향 장연의 이미지는 그의 시에 큰 소재가 되고 있는데, 아름다운 자연을 가진 고향 산천에 대한 그리움과 전원에 대한 향수는 시심(詩心)의 근원이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겨울, 눈, 시골길, 시골 마을 등이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노천명은 1918년 부친 사망과 함께 외가가 있는 서울로 이주하여 진명여고보에 입학하게 된다. 진명여학교에서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이 때 뛰어난 어휘력으로 ‘국어사전’이란 별명을 들었으며, 단거리 달리기 선수로도 활약하였다. 그러나 진명여고보 시절 천명의 성격은 애수와 고독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편모 슬하에서 자란 점, 어린 동생의 죽음, 낯선 도시 생활에서 오는 외로움 등으로 언제나 그에게는 애수와 고독이 따라 다녔고, 진명여고보를 졸업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고독은 더욱 깊어졌다.


1930년 4월에 노천명은 이화여전 영문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는 무엇보다 천명이 이상에 불탔던 때이고, 시를 향한 열의가 강했던 때였다. 이 무렵의 시는 어머니를 여윈 상실감에서 오는 고독감의 시가 많았다. 천명의 문학적 소양은 이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데, 1932년 이화여전 교수이며 시인이었던 김상용의 추천으로 시 ‘밤의 찬미’, ‘포구의 밤‘ 등이 「신동아」 에 발표되면서 그의 명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갓 선을 보인 그의 시는 당시 문단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내향적이면서도 대처럼 곧은 성격을 가진 노천명의 이화여전 시절은 고독하긴 하였으나 정신적인 풍요를 누림으로써 결코 어둡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적이면서도 지적인 시풍으로 생의 고뇌와
현실의 차가움을 노래
시는 곧 인생이라며...그리움을 숨쉬며 살다간 여인...

 

♠ 기자로 활약하다
졸업후 노천명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하여 활동하게 되면서 당시로서는 첨단을 걷는 신여성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남자들 틈에서 생활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천명은 1935년 「시원 」 창간호에 시 ‘내 청춘의 배는’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막연한 청춘의 비애를 직설적으로 노래한 ‘내 청춘의 배는’의 수준 높은 작품성으로 천명은 촉망받는 여류시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37년 천명은 그 동안 몸담고 있던 조선·중앙일보를 사직하고 북간도의 용정, 연길 등지를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 얻은 사색과 경험은 그의 시세계를 넓혀 주는 계기가 되었다. ‘우마차’, ‘낯선 거리’ 등이 이 여행길에서 얻어진 작품이었다. 본격적으로 문필 생활을 시작한 천명은 ‘사슴’, ‘슬픈 그림’ 등의 작품들을 모아 1938년 1월 처녀 시집 「산호림」을 출판하게 되었다. 노천명 특유의 고독과 향수의 문학세계를 구축한 「산호림」이 출간되자 당시 문단에서는 천명을 한국의 새로운 샛별이자 프랑스의 유명한 여류시인 마리 로랑 생에 비견할 만한 시인이라며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노천명은 첫 시집을 낸 후 다시 사회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8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월간 「여성」지의 편집일을 보는 한편 그 당시 인사동 태화여자관 안에 있던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하였다. 이 때 천명은 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수이며 영문학자였던 김광진과 만나게 된다. 이는 노천명의 생애에 있어서 단 한 번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김광진이 유부남이었고, 우유부단했던 탓에 그 사랑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사랑이 실패로 돌아감에 따라 천명의 성격은 더욱 우울하고 고독해졌다. 이 사건이 노천명에게 어떠한 결심을 하게 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노천명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갔다.


1945년 노천명은 두 번째 시집 「창변」을 발표하였다. 「창변」은 노천명의 원숙해진 역량을 보여주는 한편, 시대적 상황 때문에 친일적인 시를 수록하여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는 떠돌이 남사당의 서글픔을 읊은 명작을 남겼다.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삼단같이 머리를 따아 내린
사나이.
초림에 쾌자를 걸친 조라치(소라를 부는 취타수)들이
날라리(태평소)를 부는 저녁이면 다홍치마를 두루고
나는 향단이가 된다.
산넘어 지나온 저 동리엔 은반지를 사주고 싶은 고운
처녀도 있었건만
다음날이면 떠남을 짓는 처녀야
나는 집시의 피였다. 내일은 또 어느 동리로 들어간다냐.
우리들의 도구를 실은 노새의 뒤를 따라 산딸기의
이슬을 털며 길에 오르는 새벽은 구경꾼을 모으는
날라리 소리처럼 슬픔과 기쁨이 섞여 핀다.
[‘남사당’ 중에서]

 

1947년 노천명은 부녀신문 차장직을 사직하는 것으로 15년에 걸친 기자 생활을 끝마쳤다. 천명의 시에 새로운 전환점이 오기 시작한 것은 해방 후였다. 그것은 현실 인식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민족 상잔의 비극인 6.25동란이후의 변화가 컸다. 6.25 전쟁을 맞으면서 천명은 피난하지 못한 채 공산당의 치하에서 오로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문학가 동맹에 가입하여 불안한 생활을 하였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9.28 수복 후 역적의 혐의로 20여년의 실형을 언도받아 1950년 10월부터 1951년 4월까지 만 6개월간의 영어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노천명에게 있어 육체적, 정신적으로 매우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 실제로는 불순한 사상이 없어 김광섭, 이헌구 등의 사면 노력으로 풀리게 되지만, 옥고를 치루고 난 후 그 쓰라린 체험을 바탕으로 「산다는 일」, 「자동차」, 「이기는 사람들의 얼굴」 등의 수필집과 제 3시집 「별을 쳐다보며」(1953년) 등을 잇달아 출간였다.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를 비롯한 이 시기의 작품들은 시의 소재가 보다 현실적이었다. 현실의 비애에서 오는 고발,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들과 허무한 인간사에 대한 괴로움 등을 담았다. 또 옥중시 ‘별은 창에’, ‘누가 알아줄 전사냐’, ‘북으로 북으로’ 등은 민족에 대한 항변과 자조로 가득차 있었다.

 


석방 후 그는 중앙방송국 촉탁으로 6개월간 근무하게 되며 서라벌 예술대학, 국민대학, 이화여대 등에 출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 가해진 아픈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았고, 이 시기 사랑하는 조카의 죽음 등 충격적인 사건들로 인해 가톨릭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는 1951년 영세를 받고 베로니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노천명은 1954년 수필집 「나의 생활백서」, 1955년에는 「여성서간문독본」을 간행하는 등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그의 만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너무 지쳐 있는 상태였다. 거의 시를 쓸 수 없었다. 그 때 모교였던 이화여대에서 「이화 70년사」의 집필을 의뢰하였다. 천명은 「이화 70년사」 집필 도중 뇌빈혈로 쓰러지게 된다. 그리고 발병 석달만인 1957년 6월 누하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1930년대 시단을 꽃 피웠던 여류 문인들 중 한 거목이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1958년 유고 시집 「사슴의 노래」가 출간되었다.


노천명은 그의 일생을 바쳐 시를 쓰면서, 시와 자신의 생애를 가능한 한 밀착시키려 했던 시인이었다. 민족적 고통의 시대를 외롭게 살다간 천명은 어린 시절 추억으로 부터 오는 고독에서, 도회의 문명에서 오는 고독,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오는 고독, 사회적 환경에서 비롯된 상실감과 향수 등 다양한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주옥같은 작품들은 노천명이 떠난 지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불행했던 한국의 역사와 더불어 가슴을 적시며 다가와 우리로 하여금 비극의 시대를 살아간 외로운 시인 노천명을 잊지 못하게 한다. 우리 문학의 질을 한단계 높여 주며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자리매김한 노천명의 업적과 그의 아름다운 시는 길이 보전될 것이다.

 

 

                                                      자료정리/최경연 리포터womenisnews@hanmail.net

최경연리포터(womenisnews@hanmail.net)

2006-02-15, HIT : 1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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