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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1] 여성의 역사를 남긴 사람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로 패기와 총명과 미모를 갖춘 권기옥은 1901년 1월 11일 평양 근교의 동명왕릉에서 멀지 않은 설멜이라는 평화로운 마을에서 아버지 권돈각과 어머니 장문명의 4녀 1남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 권돈각은 원래 부잣집 아들이었으나 학문보다는 놀기를 좋아하고 능란한 언변에다 유머러스한 감각이 있는 사람이어서 평양에서 누구나 다 아는 ‘봉이 김선달’로 통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깡그리 날려 권기옥이 4세 되던 해에 남의 집 문간방살이를 해야 할 만큼 패가하고 말았다. 그녀는 11살에 은단공장에 취직하여 집안 살림을 도와야만 했고, 학교도 제 나이에 입학하지 못하였다가 12살이 되어서야 장대현 교회에서 운영하는 숭현 소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16살 되던 1917년, 그녀는 미국인 비행사 스미드가 평양의 푸른 창공에서 비행시범하는 것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고는 자신은 장차 반드시 비행사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송죽결사대’에 가입, 3ㆍ1독립운동에 참가

 

권기옥은 숭현학교를 졸업한 후 곧 숭의여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때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내ㆍ외의 민족독립 운동가들이 자주독립 거사를 준비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그녀는 수학 담당교사인 박현숙의 부름을 받아 독립을 위해 일할 것을 권고 받고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결심했다.

 

숭의여학교에는 1913년 이래 송죽결사대라는 비밀 조직이 있어 투철한 조국 독립정신을 지닌 정예 학생을 회원으로 확보하고 이들에게 민족정신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박현숙은 송죽결사대의 초기 회원이었으며, 그는 졸업 후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있을 때와 다시 숭의여학교로 부임한 후에도 계속하여 송죽결사대 지하운동을 행하였다. 이 지하운동은 민족운동계에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으며, 1919년 3ㆍ1운동이 준비되는 과정에 평양 남산현교회의 신홍식 목사로부터 3ㆍ1거사에 참가해달라는 당부를 받게 된다.

 

권기옥, 한선부, 김수녹, 차진희, 최순덕, 김명덕 등의 학생은 박현숙의 지도로 기숙사안에서 태극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기숙사를 감시하는 일본인 여선생 호시꼬(星子)의 눈을 피해 태극기를 만들고, 한편으로는 애국가 가사도 등사하여 대찰리의 어느 민간인집 장롱 속에 깊숙이 감추어 두었다가, 다시 치마 속에 감추어 숭덕학교 지하실까지 운반하였다. 여자에 대한 일경의 취체가 약한 틈을 이용하여 태극기나 독립선언서 등의 운반은 여학생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드디어 기미년 3월 1일이 왔다. 평양에서는 숭덕학교에서 강규찬 목사가, 남산 현교회에서 박석훈목사가 각각 같은 시간에 개회선언을 하였다. 숭덕학교에서는 김선주 목사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고, 이어 곽권응 목사가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모여 섰던 수많은 사람들은 이에 힘을 얻어 노도처럼 숭덕학교 교정을 뛰쳐나와 거리로 거리로 내달았다. 권기옥도 대한독립 만세를 목청 높여 부르며 군중 속에 섞여 정신없이 앞으로 나갔다. 이날 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고 압제의 일제 쇠사슬이 끊겨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주동자를 색출 체포하기 시작하였으며 잔악한 보복이 뒤따랐다. 이날 저녁 박현숙이 체포되고 학교 주변에는 형사대가 깔렸다.

 

그러나 권기옥은 겁내지 않고 다시 한선부, 편성심, 김순복 등 20여명과 함께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불렀다. 며칠 후 길을 걸어가다가 이 일에 관련되어 권기옥은 길에서 형사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평양경찰서에서 3주의 구류처분을 받아 유치장 생활을 하였다. 유치장에서 풀려나온 권기옥은 독립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모을 것을 결심하고, 숭의 학생들 사이에서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긴 머리를 잘라 팔아 오기도 하고 어머니의 패물을 판 돈을 내놓기도 하였다.

 

한번은 독립운동가 김재덕으로부터 평양근교 30리 밖 과수원에 가서 권총을 찾아다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권기옥은 여러 가지 생각 끝에 그 일을 동생 기복에게 부탁하였다. 동생은 권총을 발목에 노끈으로 묶고 그 위에 대님을 맨 다음 자전거로 그 권총을 무사히 가져왔다. 이 권총은 권기옥의 어머니가 맡아 무사히 전했으나 김재덕이 권총 시험을 하다가 잘못하여 오발로 총소리를 내고 말았다. 권기옥은 이 사건에 대한 혐의를 받아 다시 평양경찰서에 구속되었다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 나왔다.

 

권기옥의 독립활동은 더 활발하여져 이번에는 상해 임시정부 발행공채를 맡아 몰래 사람을 찾아다니며 팔았다. 이것은 임시정부 요원으로서의 활동인 것이다. 그녀는 요주목 인물이 되어 있어 항상 형사의 미행을 받아야 했다. 그 결과 끈질기게 미행하는 형사에게 활동이 들켜 또다시 체포되었다.

▶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당해...

 

이번의 체포는 그 이전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혹독한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유치장 천정에 거꾸로 매달린 채 들어붓듯이 물을 먹여 졸도하기만도 수십 번이었다. 이처럼 혹독한 고문은 임시정부 공채 판매의 배후를 알아내려는 것이었다. 의지가 강한 그는 아무리 모진 고문에도 입을 열지 않자 일본인 다나까(田中)형사는 검찰로 송치하는 권기옥의 신문조서에 “이 여자는 지독해서 도무지 말을 하지 않는다. 검찰에서 단단히 다루기 바란다.” 는 쪽지까지 곁들여 보냈다. 그러나 여기서도 혐의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으므로 집행유예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었으나 쪽지 때문에 제령위반이라는 죄명으로 징역 6개월의 실형을 선고 받았다.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출옥한 후에도 권기옥에게는 일제 감시의 눈이 떠나지를 않았다.

 

독립을 위해서는 몸을 아끼지 않는 권기옥의 의지와 용기는 국내 항일의열 활동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1920년 8월, 상해 임정의 특명으로 광복군사령장의 지휘하에 파견된 장덕진(張德震), 문일민(文一民) 등 4명이 비밀리에 입국하였다. 이들은 애국지사와 국내 동포들을 핍박하는 평안남도 도청을 폭파하기 위해서 온 것이었다. 이 일은 평양 거주인의 도움 없이는 용이한 것이 아니므로 이들은 권기옥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감시를 받는 터라 권기옥은 담을 넘어가 그들을 만나고 숭현학교 수위 영감의 도움으로 그 학교 지하실 석탄창고에 숨어서 폭탄을 제조했다. 거사일인 8월 3일, 평남도청에서는 폭발사고가 일어났으나 폭파 관련인은 한명도 잡히지 않았다.

그 당시 평양 숭실학교에는 브람스 밴드를 연주하면서 전도하는 색다른 전도대가 조직 활동되고 있었다. 권기옥은 이 전도대에 흥미를 갖고 숭실 전도대의 리더인 차광석의 조언을 받으며 한선부, 차순석, 차묘석 등과 여자 전도대를 조직 활동하였다. 장대현 교회에서 첫 전도회를 개최하고 이어 평남 평북지방 일대를 순회하며 전도와 더불어 생활 및 의식 개혁운동을 펴갔다.

 

여자전도회는 가는 곳마다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 활동도 날로 활발하게 되었다. 경찰은 이 활동이 단순한 종교적 목적의 것이 아니라는 판단으로 감시하기 시작하였으며, 권기옥은 전도대장이라는 직분 때문에 경찰에 연행되어 시말서를 쓰곤 했다. 그럼에도 이 활동을 계속하자 경찰의 감시가 더욱 심해지더니 드디어 권기옥에게 재구속 영장을 발부하게 되었다.

▶ 상해로 망명, 운남공군사관학교 입학

 

이 사실을 미리 안 권기옥은 발동기 없는 목선을 타고 건멸치배에 숨어 상해로의 망명의 길에 올랐다. 황해바다 일엽주에 몸을 의탁한 권기옥은 전날 소녀시절부터 꿈꾸어왔던 비행사의 희망을 실현하리라 굳게 결심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권기옥은 우선 임시정부 의정원 손정도 의장의 집에 머물렀다. 거기서 그는 남경에서 80여명의 한국 학생이 공부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김규식박사 부인 김순애의 소개장을 가지고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홍도여자중학을 찾아갔다. 이때 그의 나이 21세였다. 그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운남공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이 운남공군사관학교에는 프랑스에서 구입한 비행기가 20대 있었고, 프랑스 교관 2명까지 초빙되어 사관생도들에게 맹렬한 훈련을 시켰다. 권기옥은 남학생들을 능가하는 인내와 투지력으로 열심히 조종술을 익히고, 기초 이론과 지상 실습교육을 훌륭히 끝내고 프랑스제 꼬드롱 쌍엽 훈련기도 처음으로 타보았다. 이에 여자 조종사가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으며, 그 조종사가 국내에서 조국 독립운동을 하다가 망명해온 한국 여학생이라는 사실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 관헌은 민모라는 한국인 청년을 매수하여 권기옥을 암살하도록 했다. 권기옥은 이 사실을 알고 이영부, 장지일 등 3인과 함께 민모를 공동묘지로 유인하여 사살해 버렸다. 그후 일본 영사관측에서는 노상(路上) 어디서든 권기옥을 만나면 사살하라고 명령하여, 권기옥은 한때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학교 안에서만 생활했다.

▶ 중국의 중앙 공군으로 맹활약

 

권기옥이 27세 되던 해 일본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이상정(李相定, 일명 李然皓)과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도 권기옥은 중국 중앙 공군으로서의 맹활약을 하였다. 10여 년간 반군 소멸작전과 반공작전과 2ㆍ28 대일작전 등에 직접 참가하였다. 권기옥은 첫 출전에서부터 계급 승진이 빨라 소령, 중령으로까지 승급하였다가 공군 개편으로 대위가 되었다.

 

권기옥은 혁명공군 초창기에 공군을 선정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는 기금을 모으고 선전을 하기 위해 중국인 여자 혁명가 한 사람을 비행기에 동행하여 중국 일주를 한 일도 있었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가을에 권기옥은 육군 참모 학교의 교관직을 맡게 되었으며, 거기서 영어, 일어를 교수하였고, 일본인 식별법과 일본인 성격 같은 것도 교수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일본의 패전을 알았다. 광복후 계속해서 상해에서 활약하던 남편은 1947년 10월,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조국으로 달려갔다. 귀국 한달만인 11월 27일 남편은 뇌일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1948년 8월, 여비행사의 꿈을 망명지에서 실현했던 권기옥이 조국을 떠난 지 30년만에 귀국하였다.

 

조국땅에 새로 세워진 대한민국에서도 인재 권기옥을 필요로 했다. 6ㆍ25 전란 당시 그녀는 국방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약하였고 이 위원직을 1955년까지 맡고 있었다. 1957년에는 『한국년감』의 발행인이 되어 1972년까지 16년간 출판사업을 했으며, 한중 문화협회 부회장도 역임하는 등 만년까지 그를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서나 성을 다하는 활동을 했다. 그녀의 빛나는 애국활동으로 1977년 정부로부터 애국장에 서훈되었으며, 자녀가 없어 고양이 한 마리와 벗하며 조용한 노년을 보내던 그는 1988년 4월 19일 생을 마쳤다.

 

                                   자료정리/최경연 리포터

편집부(womenisnews@hanmail.net)

2006-01-27, HIT : 3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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