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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여성의 역사를 남긴 사람들 -김탄실

[2006-09-14]
 
 
 

김탄실(1896~?)

 

성의 갈등과 상실을 민족사랑으로 승화시킨 여류문인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 여류 소설가

1930년대 인기 여배우로 활동해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근대시인이자 영화배우였던 김탄실(金彈實)의 본명은 김명순(金明淳)인데, 그의 어머니는 김인정(金仁貞)이라고 기록된 곳도 있다.  그의 아버지에게 첩이 여러 명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혼란이 생긴 것이다.

 

김명순이 나중에 지은 자전적 소설 <탄실이와 주영이>에는 기생이었던 그의 어머니 이름이 산월(山月)이라고 나오지만, 가명인지 본명인지도 확실치 않다.


♠ 소실에게서 태어나 신학문을 배우고

김명순은 어렸을 때에 탄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는 이 이름에 애착을 느껴서, 뒷날 작가로 등단한 뒤에는 망양초(望洋草)라는 이름과 함께 김탄실(金彈實)을 필명으로 썼다. 당시까지도 우리나라 대부분의 여인들은 아무런 이름도 없이 한평생을 살았다.

 

그런 시대에 살면서 이름을 넷이나 가지고 활동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는데, 이러한 비극은 첩을 데리고 사는 아버지라는 남자가, 또 아직도 여성의 활동에 대해서는 편견이 많았던 조선식민지사회가 그에게 지워준 부담이었다.


♠ 최초의 여류문인으로 등단해

1917년에 「청춘」이라는 잡지에서 소설을 현상모집하자 그는 ‘의심의 소녀’라는 제목으로 단편소설을 지어 응모했는데, 춘원 이광수와 육당 최남선이 심사를 맡아 그를 2등으로 뽑았다. 그는 22세의 나이로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여류소설가가 된 것이다. 

2년 뒤인 1919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동인 잡지인 「창조(創造)」가 창간되자, 그는 김동인ㆍ전영택 등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당시에는 아직 본격적인 여류문인이 없었으므로, 그는 유일한(?) 홍일점이었다. 삼일운동 이듬해인 1920년에는 「폐허」라는 동인지가 창간되었는데, 그는 오상순ㆍ염상섭ㆍ이병도 등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동인지에는 김원주(김일엽)ㆍ나혜석 같은 여류문인도 동인으로 참여하였다. 1,2년 사이에 여류문인들이 그만큼 늘어난 것이다.

 

1925년에는 학국 최초의 여류기자인 이각경의 뒤를 이어 매일신보사에서 공모한 여류기자로 선발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조선일보」,「동아일보」,「매일신보」같은 신문을 비롯하여, 「조선문단」같은 잡지에까지 활동범위를 넓혔다.


♠ 영화배우로도 활동했지만

김탄실은 이경손 감독의 권유로 1927년‘광랑(狂浪)’이라는 영화에 나운규와 함께 주연으로 출연했다.

당시에는 여배우가 따로 없어서, 문단활동을 하며 외국유학도 해서 남자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던 그가 영화에 여자주인공으로 발탁되었던 것이다.

 

1930년은 영화배우로서 그의 전성기였다. 안종화 감독이 제작하는 ‘꽃장사,’ ‘노래하는 시절,’ 등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전국 극장에서 그의 얼굴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영화수업을 받지 못했던 그의 배우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미 창작기력을 소진한 그는 더 이상의 시나 소설도 발표하지 못하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영화출연도 교섭이 들어오지 않아, 남의 집에서 밥이나 빌어먹는 처지로 전락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아이까지 데리고 나왔던 그는 그뒤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1939년 1월호 「삼천리」에 실린 시 ‘그믐밤’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

 

1951년까지 일본에서 살았던 그는 주로 동경 Y.M.C.A.회관 뒷채에 얹혀 살았는데, 마지막에는 정신병이 더욱 심해져서 청산도립(靑山都立) 뇌병원에서 죽었다.

 

이 시기의 모습에 대해서는 「현대문학」 1955년 4월호에 실린 전영택의 소설 ‘김탄실과 그 아들’이 가장 확실한 자료이다. 전영택은 김탄실과 20대에 「창조」동인으로 함께 활약했으므로, 마지막까지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죽은지 30년이 지나서야 한평생 남겼던 시 60편, 소설 14편, 수필과 평론 7편이 김상배에 의해서 「김탄실-나는 사랑한다」라는 제목의 책이 1981년 솔뫼에서 묶어져 나왔다.


♠ 성의 갈등과 상실을 민족사랑으로 승화시키다


그는 망양초라는 필명으로 많은 시를 지었는데, 이따금 탄실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그의 시는 바로 자신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25세에 처음 발표했던 ‘조로(朝露)의 화몽(花夢)’은 자신을 백장미와 홍장미 두 개의 성격으로 설정했는데, 동생 홍장미의 말을 통해서 남성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왜 내가 더 피거든 온다고 약속하고 가신 이 말이요, 그이가 왔는데 제게는 아니오고 저어, 언니께로 왔어요. 그리고 저를 돌려다도 안보았어요. 그럴 동안에 언니도 저를 안보시고 아주 득의스럽게 미소하시지요?”

그는 당시의 조선 여성들과는 달리, 남성관계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신여성이라 하더라도, 남자보다는 앞설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시에도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세계에서 갈등하는 그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남성을 기다리다가 지친 김탄실 자신의 모습이 탐미적으로 그려져 있다.

133행이나 되는 긴 시에서 남호접(藍胡蝶)으로 은유한 남성에 대한 깊은 동경과 망양초의 연애사건을 자유롭게 전개시켰다. 그는 일찍 어머니를 잃고 모성상실감 속에서 배다른 남매들 속에 자랐으므로, 그의 시에서는 고아의식과 죽음의식이 자생적으로 표출되었다.

 

김탄실이 특별한 저항시인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젊은날 가졌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되자 결국 조국을 빼앗겼다는 사실까지 뼈에 사무쳐, 민족의 탄식을 대변하게 된 것이다.

김탄실의 시가 대부분 과거의 시간과 공간을 노래했는데, 이 시에 오면 미래를 위한 준비로 나타난다.

 

현재 옆에 없는 님을 그리워하고 과거회상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빼앗긴 님, 조국을 만날 희망을 가지고, 그 희망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대책없는 탄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광복에 대한 예시적 영상을 표출하였다.

 

김탄실은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살았던 아버지와 첩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뒤에는 동경유학과 문단활동을 통해서 수많은 남성지식인들과 연애했지만, 그들은 그를 신여성이라는 호기심에서 만났을 뿐 결혼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김동인의 소설 <김연실전>에 이러한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그의 시에는 이러한 성의 갈등이 모성애상실과 조국상실로 확대되어, 겨레와 나라를 사랑하는 여성으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현모양처형의 아내를 원하는 개화기에 신여성이 몸으로 부딪치며 겪었던 도전과 패배가 그의 생애와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자료정리/김옥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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